이성복 소이면장
이성복 소이면장
  • 유재윤
  • 승인 2012.06.14 14: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8년, 그리고 퇴직…그것은 또 다른 시작


직장일도 내 가정에서 하듯 하면 못 할 일이 없다

마지막처럼 보이는 시간들.
모든 열정과 생의 모든 것을 바친 일의 마지막에서 어떤 이는 좌절을, 어떤 이는 희망을, 어떤 이는 또 다른 꿈을 위해 두 주먹을 불끈 쥔다.
38년여의 공직 생활을 마치며, 대과 없이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음을 항상 감사하고, 또 다른 희망을 찾아 새로운 삶을 준비 하고 있는 이성복 소이면장, 오늘 음성자치신문이 모신 여기!이사람 이다.

대대로 그 땅에서 태어나 오래도록 살아 내려오는 사람을 우리는 토박이라 말한다.
이성복 소이면장.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음성에서 태어나 60여 년의 세월동안 고교졸업 후 잠시잠깐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음성땅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음성 군민들은 그에게 더욱더 친밀감을 느끼는지 모른다.
그는 6.25의 포성이 한창인 1952년 음성군 소이면 대장리 에서 아버지 이연구(1973년 작고)씨와 어머니 양복녀(2001년 작고) 여사와의 사이에 5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 시절 우리네 농촌 현실이 누구나 그러하듯이 그의 집도 가난한 빈농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흠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이 오늘날 우리를 이 자리에 서게 한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이 면장은 대장초(9회)와 음성중을 거쳐 충주실고를 졸업했다.
이 면장은 졸업 후 먹고 살기위해,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 서울 길에 올랐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그것도 7남매의 막내인 이 면장이 당시 고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이 면장 에게 서울이란 사회는 그리 관대하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일했다. 배달부에서 잡상인까지.
그 소식을 접한 고향의 부모님과 형제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모님과 형님들의 권유로 귀향 짐을 꾸렸다.
형님들의 권유로 공무원시험을 치렀다.
어쩌면 그것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큰형님이 호적 공무원이었고, 작은 형님역시 공무원(이용복 24대 소이면장)이었으며, 넷째 형님도 철도 공무원이었으니 자연스레 분위기가 그쪽으로 흘렀다.
1974년 5월28일.
그렇게 시작한 공무원 생활이 어언 38년.
38년여의 공직 생활 중 이 면장은 단 한번도 음성군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본청에 근무한 적도 없었다.
순전히 행정의 최 일선인 읍·면에서만 근무해왔다.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본청 근무에 욕심도 부릴 만 했지만 이 면장은 그냥 그게 좋았다.
그러나 그에겐 소신이 있었다.
진정으로 음성군이 발전하려면 본청도 좋지만 읍면에서 주민들과 밀착해 펼치는 주민밀착형 행정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소신 말이다.
음성의 9개 읍·면 중 금왕과 삼성을 제외한 7개 읍면에서 총무, 산업, 회계 등 안해 본 일이 없다.
다시 말하면 음성군 역사의 산 증인이다.
군내 구석구석을 발로 뛰며 어떻게 하면 주민들이 좀 더 편하고 잘 살 수 있을까를 연구 했다.
70년대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새마을 운동을 시작으로 공동 모내기작업, 공동 퇴비작업, 슬레이트 지붕개량사업 등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어려운 만큼 보람도 많았다.
2003년 맹동면 근무 시 어려운 여건에서도 주민들의 휴식처인 맹동체육공원을 조성한 일은 지금도 가장 큰 보람으로 남는다.
80년대 농업직에서 행정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환직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해 진급이 늦어지고 신분상 제약을 받기도 했지만, 그보다 국가에서 받은 혜택이 너무 많기에 후회는 하지 않는다.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강하고 급한 성격에 업무를 추진함에 있어, 때론 오해도 받긴 하지만 그 자리를 떠난 후엔 반드시 다시 찾게 되는 사람 이성복 면장.
자신의 입신을 위해서 가끔은 윗사람에게 아첨도 해보고 고개를 조아릴 법도 하지만, 타고난 성격 탓에 오로지 앞만 보고 살아온 이성복 면장. 그런 그이기에 음성군민들은 그의 퇴직을 더욱 아쉬워하는 지도 모른다.
직장 생활도 내 가정에서 하듯 하면 못할 일이 없다는 이 면장은, 후배 공무원들에게 너무 이기주의에 빠지지 말고 더불어 일하는 직장,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는 공무원, 가정에 충실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공직자가 되어주길 바란다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는다.
38년간 매일 8시 이전에 출근, 하루 일과를 체크하고 점검하는 습성이 몸에 배인 탓에 새벽형 인간이 되어버린 이 면장, 그러나 그 이면엔 가족들에게 소홀했다는 자책감도 든단다.
38년여 동안 오로지 국가와 음성군 발전을 위해 일해 온 탓에 가정에 소홀 했던 점이 지금도 동갑나기 동창인 아내(신향섭 여사)와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 면장은 그동안 묵묵히 내조하며 지켜봐준 아내에게 감사하고, 부모노릇 제대로 못하는 아버지에게 불평한마디 없이 속 안 썩이고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앞으론 취미 생활도 하고 가족과 함께 못다 한 사랑도 나누며, 새로운 계획을 설계해보겠다는 이 면장은, 과분한 정을 주시고 아무사고 없이 공직생활을 마칠 수 있게 도와준 동료공직자와 음성군민에게 너무도 감사하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친다.
38년, 그리고 퇴직…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다.
이제 기나긴 공직생활을 마치고 자연인으로서, 음성군의 발전을 위해 또 다른 삶을 구상하고 있는 이성복 면장에게 군민 모두의 뜨거운 박수와 격려를 보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