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열 해병대전우회 충청북도연합회 음성지회 고문
이창열 해병대전우회 충청북도연합회 음성지회 고문
  • 김희규
  • 승인 2010.07.02 12: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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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인생, 이젠 남을 위해 희생·봉사하며 살리라!”


뜨거운 뙤약볕 아래 해병전우회 정복을 차려입고 홀로 묵묵히 봉사활동을 하시며 구슬땀을 흘리고 계신 이창열 해병전우회 음성지회 고문을 만나러 음성여중 교정을 찾았다. 6월임에도 불구하고 아스팔트 위 열사꽃이 활짝 피어오르며, 서있는 것 조차 버거운 날씨였지만 외로이 봉사활동을 하는 그의 모습 속에서 봉사의 참된 정신과 진정어린 봉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솔한 얘기를 들어보았다.

이창열 고문은 1945년 4월 7일 평안남도 순창시 북창면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 밑에서 3남 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나이 6살이 되던 해. 한반도에서 가장 비극적인 전쟁으로 기억되는 6.25 전쟁이 발발했다.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현실이 벌어지게 되었고 240여만명의 피난민 속에서 가족들과 헤어지는 뼈아픈 현실을 겪게 된다. 그 시절을 회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의 모습에서 조금이나마 6·25전쟁의 참혹한 현실과 역경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정도 피난생활을 하며 안동, 원주를 전전하다 춘천이 수복되던 해인 1951년 6월부터 춘천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고문은 춘천 봉의초를 졸업하고 성수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시국이 어수선하여 중도에 포기를 하고 끼니를 연명하기 위해 이곳 저곳 직업전선에 뛰어들며 험난한 인생역경을 경험하다 1962년 10월 2일 해병 134기로 입대해 훈련을 받고 1963년 김포 최전방에 배치되어 막사도 없이 해병대 군 생활을 했다고 한다.

당시 군 구호물품이 부족해 땅굴을 막사삼아 생활하면서도 “우리는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난 직후에 군대를 간 사람이기 때문에 군 기강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엄했고 무서웠다”고 당시를 회고 하기도 했다.

1968년 2월 전역하고 가평과 서울을 오가며 생활하다 1972년 경기도 양평 양수리에서 인생의 첫 종착지에 다다르게 된다.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정서적으로 많은 안정감을 찾아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여유를 느낄 겨를도 없이 1978년부터는 해외 중동근로자 파견, 이란내전 당시 현대건설 직원 가스공사 근로자 파견, 사우디 알코바 현장 타워크레인 운전 등을 하며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타워크레인을 운전할때는 “집채만한 함석판이 바람개비처럼 날아가 동료를 다치게 하는 것은 부지기수”였고 “가스공사 차량전복 사고로 눈앞에서 5명의 동료가 죽고 18명이 부상을 당하는 현장에도 있었다”며 당시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10여년 가까이 해외 근로자로 근무하다 1986년 제2의 고향인 양평으로 돌아와 해병전우회에 일원으로 학생들 등,하굣길 교통정리, 지역행사 교통정리, 인명구조활동 봉사를 펼쳐오며 비로소 봉사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사회소외계층과 지역을 위해 봉사활동을 펼치며 범위를 넓히려던 중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된다. 갑작스런 뇌경색으로 쓰러져 반신불구 상태가 돼 버린 것이다.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은 2005년도의 일이다.

봉사활동은 커녕 자신의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전국의 청정도시를 헤매다 이곳 음성 용산저수지 근처에 있는 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맑은 공기와 청정환경 덕에 조금씩 회복돼 제2의 인생을 맞이하며 '남은 여생,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살으리라' 다짐했다고 전했다.

이창열 고문은 우리 군에 각종 행사가 있는 장소라면 어디서든 그를 만날 수 있다. 남이 시켜서 하는 봉사가 아니라, 진정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봉사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음성 설성문화재 교통봉사, 음성 품바축제 교통봉사, 각종 문화예술공연 교통봉사, 독거노인 연탄 나눔 봉사, 집수리 봉사 등 사람이 붐비는 곳이거나 도움이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그가 있다.

봉사를 해 오며 아무리 궂은 날씨, 무더운 날씨일지라도 누군가 “수고하세요!”라는 말 한마디 건넬 때면 없던 힘도 생기고 피로가 싹 풀린다고 하며 오히려 그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할 정도라고 한다.

2010년 3월부터는 음성여중 학교지킴이로 근무하며 학생들의 등·하굣길 교통봉사는 물론 학생선도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 고문은 봉사를 통해 “봉사라고 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며, 누군가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무척이나 감사드리고, 봉사할 때 몸은 비록 힘들지만 하고 난 뒤 그 뿌듯함과 든든함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이나 행복하다”며 “힘 닿는데 까지는 꾸준히 봉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평소 “남한테 피해주지 말고 소신껏 살아가자”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묵묵히 내조해 준 부인 김상심(62)씨에게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고 무슨 봉사를 하든 불평없이 묵묵히 따라와 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이제는 함께 봉사활동 다녔으면 한다”라고 봉사의 전도사 역할도 하고 있다.

뒤돌아서는 발걸음 까지 교통정리를 해 주는 그의 모습을 보며 봉사의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깊이 성찰해야 함을 느끼며 글을 정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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