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근 상이군경회 음성군 지회장
진영근 상이군경회 음성군 지회장
  • 김희규
  • 승인 2010.06.0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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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상이군경 회원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며"


6월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시거나 다친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전쟁의 참혹한 전장 속에서 자기 한 목숨 희생하며 생을 살아오신 진영근 상이군경 회장을 만났다.

▶16세의 나이에 "민주청년 동맹"이라는 단체에
진영근 상이군경 회장은 1930년 3월 함경남도 신흥군 상원천면 풍산리에서 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셨던 부모님 밑에서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심상소학교, 신흥중학교를 졸업하시고 16세의 나이에 "민주청년 동맹"이라는 단체에 가입권유가 들어온다. 좌익 단체인 '민청(북조선민주청년동맹)'은 만 14세부터 30세까지의 학생, 근로자, 군인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공산주의 도덕과 교양 강화, 천리마운동등이 주요 임무인 북한의 유일한 청소년 사회단체라 한다. 사회주의 국가체제속에 여러번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진회장은 끝내 가입을 거부하여 소위말하는 반동분자로 낙인이 찍히게 되어 탄광촌 사업, 함경도 부정공원 동원사업에 주기적으로 끌려가 일을 하면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고 남한행을 결심하게 된다.

▶한반도에 잊지못할 최대의 비극적인 6.25 전쟁에서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6·25전쟁이 발발한다. 한반도에 잊지못할 최대의 비극적인 6·25 전쟁에서 남한의 인명 피해만 사망 373,599명, 부상 229,625명, 납치 84,532명, 피난민 240만명, 전쟁 미망인 20만명, 전쟁고아 10만명에 이른다고 보고되고 있다. 진 회장은 치열하고 비극적인 전쟁속에서도 산에 피신해 있으면서 젊은 사람들이 나와 치안을 유지시켜야 한다며 밤낮 할것없이 공산당을 포로로 잡아 수용하는 역할을 하다가 1950년 12월 21일 신흥군 흥남부두에서 2000여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거제도 장승포읍 항으로 피난하는 배에 몸을 싣게 된다. 이때 진회장의 나이가 21살이었다.

▶"이 전쟁통에 어디가서 무엇을 먹고 살거냐?"
꿈에 그리던 남한행으로 왔지만 전쟁중인 상황이라 제대로 된 삶을 연명해 갈 수 밖에 없었다. 1951년 1월까지 피난생활을 하다가 거제도에 위치한 방위군 제일장정 대기소에 머물게 된다. 추운겨울 날씨였지만 온몸에 이가 득실거려 툭툭 털어내는 등 실로 비참한 현실이었다고 전해오기도 했다. 대기소에서 방위군 생활을 하시다 1951. 3. 13일 제주도 제 1훈련소에 입소를 하여 보릿쌀을 눕히고 담요를 깔아가며 1개월 정도 훈련을 받고 4월 부산보충대로 와 일선출두명령 대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51. 7. 1일 출두명령이 떨어져 대전, 서울 등 각 지역의 전장에 참여하고 이어 김화지구에서 포병 제2사단 지원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난 10월 폭탄 파편에 복부와 좌측 대퇴부, 그리고 손 등에 부상을 입게 된다. 이후 원주, 부산 등으로 후송되어 수술을 받고 입원치료를 하다가 1952년 1월 839부대에서 전역하기에 이르렀다.
부상병 병동에서 만난 고 박광훈 전우는 "이 전쟁통에 전역한들 어디가서 무엇을 먹고 살거냐?"며 같이 살자는 권유를 받고 여주군으로 가 1주일 정도 기거하고 다시 안성시 삼죽면 고 김학주라는 전우를 찾아가지만 여의치 않아 이곳 음성 평곡리에 있는 남창현 전우의 집으로 찾아가게 되지만 남전우는 다시 전장에 입대해 오갈데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진회장은 전우의 부모를 수양부모로 모시며 음성에 정착하게 된다. 위 세 전우들은 진회장이 병동에 있을 때 가장 많이 의지했고 정신적으로 많은 위안을 삼은 전우들이라 한다.

▶여태 살아온것을 천명[天命]이라 여기며
이후 1952년 8월 음성읍사무소 상이군경 업무와 병사계 업무를 보시며 전장 중 숨진 전우 가족들에게 연락해 장례를 치루게 하는 업무와 유족가족들에게 보상금 지급 관련 업무를 도와주며 1960년까지 근무를 하고 이후 원남면 부면장, 면장, 소이면장, 맹동면 부면장, 면장, 삼성면장 등 42년 동안 공직생활에 몸을 담게 된다.
이후 1993. 6. 30. 삼성면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대한노인회 음성군지회 사무국장을 거쳐 2004년도부터 현재까지 음성군 보훈회관에서 상이군경 회장을 맡고 계신다고 한다. 진회장은 여태 살아온 것을 천명[天命]이라 여기며 평소 조상에 대해 공경하자는 공조[敬祖]를 마음 속 깊이 새긴 채 상이군경은 물론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계신다. 꾸준히 환경정화사업을 펼치고 2008년 11월에는 사비를 들여 어르신 40명에게 내의를 선물하고 보훈회관에 지원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진 회장은 회원분들에게 "젊은 청년시절에 전쟁터에 갔다 부상을 당하고 전쟁후에는 자식들을 위해 사시고 이제 좀 좋은 세상을 누릴만하니 가는 것이 많이 안타깝고 모쪼록 건강하게 오래 살며 외부생활도 좀 즐기시며 살아갔으면 좋겠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또한 부인 박귀남(76) 씨에게 "당초에 맨몸의 남편을 만나 고생하며 4남 1녀를 훌륭히 키워 학교를 남부럽지 않게 졸업시켜서 감사드리고 4남 1녀 자식들에게는 "올바르게 잘 커줘서 고맙고 항상 어른들을 공경하고 마음가짐을 가졌으면 좋겠다"라며 끝인사를 전했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은 기억을 하면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몸을 다친 살아있는 참전용사, 애국자에 대한 별도의 날이 없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느끼며 취재를 마무리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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