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병 림 삼성 향악당 단장
이 병 림 삼성 향악당 단장
  • 음성자치신문
  • 승인 2022.12.01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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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군 향악발전에 지대한 공로 세운 ‘풍물 명인’

조상 대대로 삼성면에서 살아온 토착원주민 
전국 유명한 풍물명인들 찾아다니며 ‘사사’

삼성면 생활체육공원 인근 양덕저수지 옆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는 한식 건물이 있다. 매주 월요일 저녁이면 이곳에서 꽹과리, 징, 북, 장고, 태평소 소리가 어울려 한바탕 흥겨운 풍물놀이 가락이 울려나온다. 이곳이 바로 음성군 풍물놀이의 산실인 향악당이다.  

이병림(69) 삼성향악당 단장은 향악당이 세워진 이후 수십 년 동안 이곳에서 주민들에게 풍물놀이를 지도하며 음성군의 지역 향악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세우고 있다.  

이병림 단장은 조상 대대로 삼성면 양덕3리에서 살아온 토착원주민이다. 삼성초등학교와 삼성중학교를 마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타악기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10대 후반의 나이에 드럼을 배우고 싶어 서울로 가서 드럼학원을 다녔다. 이후 생계를 위해 야간업소에 취업해 돈을 벌었다. 하지만 가족들이 그가 그런 일을 하는 걸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 무렵 이 단장은 징집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해 포병부대에 근무하게 된다. 그가 상병이 될 무렵 군악병 중 타악기주자가 제대하면서 군악대에 자리가 비자, 군내부에 드럼을 잘 치는 것으로 소문이 났던 그를 군악병으로 차출해 갔다. 이것이 이병림 단장의 삶을 뒤바꾸는 계기가 된다.

이 단장이 군악대에서 복무할 무렵인 1978년에 우리나라는 남사당패의 전통적인 공연인 풍물에서 태평소와 상모 등을 뺀 채 꽹과리, 징, 장구, 북을 가지고 앉아서 연주하는 사물놀이라는 장르가 생겨났다. 사물놀이는 강력한 리듬과 신명나는 연주로 보는 국민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일으켰다.  

당시 사물놀이 공연을 처음 목격한 이병림 단장은 “이것이야 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이다.”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때부터 장고를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풍물놀이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이 단장은 군 복무 기간을 다 마치고 제대하게 된다.

이 단장이 제대한 후 다시 야간업소에 들어갈까 봐 마음 졸이던 그의 형은 미리 직장을 잡아놓고 그가 제대하자마자 직장에 다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평범하게 직장에 다닐만한 성품이 아니었다. 이 단장은 부친이 작고한 이후 홀로 농사를 짓고 있는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짓겠다며 고향으로 내려온다. 고향으로 온 그는 실제로 열심히 농사를 지어 현재는 인삼과 벼를 재배하는 전문 농업인으로 자리를 잡고 살게 됐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단 하루도 풍물이 떠나지 않았다. 그때 마침 당시 권혁기 삼성농협조합장이 이병림 단장이 군에 있을 때 풍물을 공부했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부녀회원들에게 풍물을 가르쳐 농협 행사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이 그가 다시 풍물을 사작하게 된 계기다. 이렇게 햇 다시 풍물을 접하게 된 그는 이왕 풍물을 할 바에는 최고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당시 풍물명인으로 알려져 있던 대전의 송순갑, 안성남사당의 김기복, 청주의 이종환, 충주의 전봉근, 민속촌에서 활동했던 정인삼 선생 등을 찾아다니며 본격적인 풍물공부를 했다.

그 결과 그는 어느덧 풍물의 새로운 경지를 터득하게 됐다. 이후 그는 삼성면뿐만 아니라 음성군 내 각 읍면 풍물패들을 지도해 음성군 향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이병림 단장은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풍물을 나이든 사람만 배우는 것으로 아는 분이 있다”며 “풍물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누구나 흥겹게 연주하며 즐길 수 있으므로 젊은이들도 관심을 갖고 참여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황인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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