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진 규 대표 (진평건기 ·대소지게차)
임 진 규 대표 (진평건기 ·대소지게차)
  • 음성자치신문
  • 승인 2022.01.15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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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동안 성실과 신용으로 ‘지게차CEO 꿈’ 이뤄

 

사회에서 받은 걸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이 진짜 봉사

평생 욕심부리지 않고 살면서도 나는 행복하다자랑

 

사람의 얼굴은 이름 없는 명함이란 말이 있다.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과 살아온 삶의 궤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임진규(60) 대소지게차 대표가 그런 사람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이 누구라고 소개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먼저 그의 얼굴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원만하고 모나지 않은 성품을 지닌 사람인가를 추정해 내고 쉽게 다가선다. 그것은 사업가로서 타고난 최고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면 양덕리 출생

임진규 대표는 삼성면 양덕리가 고향이다. 그는 평생 농업에 종사하던 농업인 부모에게서 5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다 보니 부모와 형제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나 어느 한 곳도 모난 곳이 없다. 막내라면 어느 정도는 개구쟁이 같은 짓도 했을 것 같은데 그는 어릴 때부터 순둥이였다고 한다.

고향에서 삼성초등학교와 삼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수원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지금은 이름이 수원 농업생명과학고로 바뀌었지만, 그때만 해도 전문 농업인을 양성하는 명문 농업고등학교였다.

그가 이 학교에 진학한 이유는 농업경영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당시 삼성면에서 수원까지 가는 교통편이 있어 그나마 왕복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에 삼성면 출신 학생들이 이 학교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도 그런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어릴 때부터 사업가가 꿈

임 대표가 농업경영에 대해 무관심했던 이유는 어릴 때부터 농사를 짓는 부모를 보면서 자기는 자기 사업을 하는 자영업자가 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집안이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끼니를 못 이을 정도로 가난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농업경영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기 성격상 농사보다는 사업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임 대표는 단 한 번도 말썽을 부려본 적이 없는 모범학생이었다. 그런 성품은 부모로부터 받은 타고난 성품인 것 같았다. 성적도 좋아 늘 상위권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면서 치른 원예 종묘 기능사 2급 자격도 무난히 취득했다.

하지만 학교 기숙사의 강압적인 분위기가 싫어 힘들어도 스스로 자취를 선택한 자유 분망한 성품을 가진 아이이기도 했다.

그의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 있는 성실성과 얽매이지 않는 자유 분방한 성격이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일거리에 맞춰 자유 분망하게 돌아다니는 지게차 사업을 선택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형이 불러 시작한 지게차 사업

임 대표는 군대를 다녀온 후 울산에 있는 자동차 부품 전문회사인 현대정공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현대정공은 훗날 현대모비스로 사명을 변경했다. 4년 동안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서도 시간 있을 때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자격증이라도 따놓고 싶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영업자로서의 꿈이 항상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전면허증을 따기 위해 운전학원에 다니면서 중장비도 배워 중장비 면허증을 따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대소에서 지게차 사업을 하고 있던 그의 둘째 형이 동생이 중장비 면허증을 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고향으로 내려와 같이 사업하자고 권유했다. 자영업이 꿈이었던 그는 형의 권유를 받고는 즉시 고향으로 돌아와 형과 함께 지게차 사업에 투신했다. 당시 지게차 사업은 둘째 형뿐만 아니라 넷째 형도 참여해 삼 형제가 동업하는 회사가 됐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동업을 하게 되면 경제적 문제로 인해 불화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이 형제들은 얼마나 우애가 좋은지 단 한 번도 형제끼리 사업 때문에 다퉈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것이 사업을 키울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훗날 둘째 형은 원예업을 하기 위해 남은 두 형제에게 사업을 다 물려주고 떠났다고 한다. 남은 두 형제 또한 각자 독립해 현재는 각각 개인사업자로 활동하고 있다.

 

지역 사회 봉사에 눈 떠

성실하게 사업을 해나가며 기반을 다져나가던 임 대표는 어느 날 문득 자기가 잘살 수 있는 것이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임을 깨닫게 됐다. 맨몸으로 태어나서 맨몸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많은 혜택을 받고 잘살았으면 그것을 다시 세상에 돌려주고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봉사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고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우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보자고 생각한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오산3리 이장을 맡게 된다. 10년간이나 이장직을 맡아 마을 일을 감당하면서 점차 지경을 넓혀가 대소면 이장협의회 총무 일을 3년 연임하며 맡았다.

또한, 지역 자율방제단원으로 봉사활동을 할 기회를 얻게 됐다. 그가 자율방제단원이 된 것은 눈이 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게차를 끌고 나와 마을 곳곳의 눈을 도맡아 치우는 봉사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대소면 지역사회보장협의체에 가입해 홀로 거주하는 어르신들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바꿔주기 위한 집수리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대소면 자연보호협의회 회장을 맡아 자연환경 보존을 위한 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특히 음성군 자연보호협의회 사무국장으로 매년 환경의날에 육령리 생태공원에서 열리는 행사를 주관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러한 봉사활동을 통해서 그가 깨달은 것은 진정한 봉사란 내 것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받은 혜택을 다시 되돌려주는 것임을 알게 됐다고 했다. 이때부터 그는 인생의 좌우명을 봉사를 생활화하며 살자로 정했다고 한다.

 

성실과 꾸준함이 장점

임 대표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일이든지 한번 시작하면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성실하고 꾸준한 성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성실함과 꾸준함을 강조하는 것은 한 번의 경솔한 결정이 자기 인생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것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는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것이라며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성실함과 꾸준함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행복하다자랑

임 대표는 1993년 당시 나이 32세 때 3살 연하인 지금의 부인 윤일순 씨와 지인의 소개로 결혼했다. 결혼할 당시 그의 부친은 500만 원을 주면서 분가해 살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그의 살림 밑천은 단돈 500만 원이었다.

그는 이 돈을 밑천 삼아 오늘날의 가업을 이뤘으니, 그가 사회의 혜택을 보고 살았다는 고백이 진정성 있게 들린다.

그의 자식 사랑은 여느 부모 못지않게 각별하다. 그는 슬하에 아들, 딸 남매를 뒀다. 그는 젊은 시절, 담배를 하루 두세 갑씩 피우는 골초였다. 그런데 22년 전 그의 나이 38세 때 아직 어린 자녀들이 아버지에게서 담배 냄새가 난다며 인상을 찡그리자 그날로 담배를 끊어버린 결단을 보여줬다. 그는 자녀 교육이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것임을 자녀들에게 몸소 가르쳐 준 것이다.

이런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다행히도 자녀들은 자기의 앞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고 있다. 큰아들은 전주의 모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고, 딸도 자기 전공을 살려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나는 행복하다고 자랑하며 다닌다고 한다. 자기가 팔불출이라 그런 게 아니고 실제로 자식들로 인해 행복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전주에 사는 아들은 두 달에 한 번씩 찾아와 꼭 아버지 목욕을 시켜준다고 한다. 어릴 때 아버지가 자기를 키워줬으니까 이제는 자기가 아버지를 돌봐드리겠다는 마음에서라고 한다. 딸 또한 부모를 깍듯이 대하며 효도하고 있다. 그러니 마음속에서 저절로 나는 행복하다는 소리가 나올 만도 하다.

 

그의 마지막 소원 봉사

임 대표는 자기의 마지막 소원을 살아 있는 날까지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누려온 행복을 남에게 나눠주는 것이 소원이라는 것이다.

그는 어릴 때는 부모의 덕을 보고 자랐고, 성인이 돼서는 사회의 덕을 보고 살았으니, 이제는 그동안 자기가 받은 혜택을 다시 환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바로 봉사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더 많은 지역 사회 단체에서의 활동을 통해, 개인적인 수고와 헌신을 통해 더 많은 봉사활동을 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사업에서도 성공하고, 지역 사회에서도 진정한 봉사자로 인정받고 사는 임진규 대소지게차 대표의 마지막 소원이 꽃을 피워 많은 사람이 골고루 혜택을 입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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