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남면 삼용2리
원남면 삼용2리
  • 나성은
  • 승인 2010.01.18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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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풍요로움과 추억이 깃들어 있는 마을


절벽곡

비단같은 골에 봄이 오니
복숭아 꽃이 만발이라
들판에 씨앗 뿌려노니
들판이 푸른 파도를 친다.

추수대풍하니
겨울창고에 곡식이 가득하다
소나무 가지 눈꽃이 피니
천지가 흰 빛이네

춘매 반채문선생



춘매 반채문선생은 삼용마을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렇다. 위의 한시처럼 기자가 봤을 때도 “삼용2리는 풍요로움이 가득한 마을이었다”라고 자신있게 표현할 수 있다.

▶ 용당리와 행정리가 합해진 삼용2리
삼용2리는 무엇보다도 그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용당마을은 약 400년 전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는데 어느 성씨가 먼저 거주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현재는 십여 성씨가 모여 사는 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는 마을이다.
삼용리는 본래 음성군 원서면 지역으로 용당리라 하였지만,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음성군 원서면 용당리와 맹동면 삼생동, 맹동면 단월동 하 삼생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하 삼생리의 '삼'자와 용당리의 '용'자를 따 '삼용리'라 해서 원남면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삼용2리는 두 개의 자연마을이 있는데, 하나는 용당리, 다른 하나는 행정리(은행나무골)라 불리운다.
삼용2리의 용당마을은 예로부터 보천리를 경유해 서울로 가는 교통로가 발달하여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큰 장이 형성되어 성황을 이루었으며, 현재까지도 마을 주변에 그 흔적이 남아 있어 그 번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통동저수지를 만들면서 그의 보조저수지로 삼용저수지를 만들면서 마을의 많은 부분이 수몰되어 사람들이 타 지역으로 떠나 한때는 100여호가 넘는 거대한 마을이었으나 현재 30호 정도가 거주하고 있으며 주민 수는 총 62명의 아담한 마을로 변하였다. 마을의 발전을 위해 만든 저수지가 오히려 마을의 번성을 저해하고 주민들을 떠나게 만든 아이러니컬 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 삼용2리 주민들의 큰 포용력
마을을 들어서다보면 '이게 정말 시골마을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유인즉 굉장히 잘 정비된 깨끗하고 쭉 뻗은 도로 때문이다. 삼용2리를 지나는 이 깨끗한 도로는 '음성군 싸이클연맹'에서 경주가 있을 때 사용하는 도로로 경주가 있는 날 이라면 수십대의 자전거가 줄을 서서 달리는 모습이 장관이라고 한다. 또한 자전거를 타고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는 도로인데, 차를 타고 지나간다하면 더 말해서 무엇하랴.
또한 강줄기가 지나가는 도로 주변의 제방도 튼튼하게 정비되어 있다. 제방은 100%, 농로는 99.9%의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정비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도로와 제방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삼용2리에는 혐오시설중 하나인 쓰레기 매립장이 들어서 있다. 때문에 정부에서 삼용2리의 혐오시설수용에 대한 보상차원으로 이같이 농로와 제방을 정비해 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을에 혐오시설이 들어온다 하면 반대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삼용2리 사람들의 너그러운 마음은 내가 아니면 남의 마을에 들어가야 하는데, 누구든 손해를 봐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조금 양보하자며 손해 보는 마음이더라도 관용의 자세로 이러한 매립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앞으로 육군 공수부대의 낙하훈련장이 들어서게 된다고 하던데, 삼용2리 마을사람들은 “물론 좋지는 않지만, 굳이 들어온다면 받아들일 자세는 되어 있다”고 하였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상인심에 삼용2리 마을사람들의 관용정신을 본받지 않으면 과연 어떤것을 본받을 수 있으랴?

▶이곳 삼용2리는 다른 농촌마을 과는 다른 것이 있다.


바로 소방시설이다. '음성군 소방안전협회'에서 소방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는 마을을 선정해서 소방시설에 대한 증축을 지원하고 있는데, 삼용2리가 음성군에서 두 번째로 선정되어 작년 11월 소방시설 증축으로 인해 마을을 둘러보면 여기저기 소화기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골 농촌마을에 솔직히 소화기를 구비하고 있는 곳이 몇 곳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삼용2리는 이렇게 소방기구 확충으로 인해 건조하고 불이나기 쉬운 겨울을 안전하게 보내고 있었다.

▶삼용2리는 이촌향도 현상을 절실하게 느끼는 마을이다.
고령화로 인해 평균 70세 이상의 연령분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누가 그러지 않았는가? 인생은 60 부터라고... 마을사람들은 고령화에도 불구하고 17가구의 농가가 인삼, 고추, 벼 등의 작물들을 재배해 제법 소득이 좋다. 면에서도 중위권 정도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하는데 작은 마을이고, 고령화 마을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기자가 취재를 하러 마을을 찾은 날이 마을 총회날 이었는데, 어르신들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나이가 무색할 만큼 유쾌하게 농담도 하시며 적극적이고 즐겁게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젊게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즐거운 취재였다.
또한 김원호 이장은 "어머니의 품같은 고향에 출향인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며 지금은 마을을 떠나 있지만 언젠가는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올 출향인들이 마을에 대한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며 토로했다.

/우/리/마/을/사/람/들/


김원호 이장
김원호 이장
“마을 주민들의 화합을 중심으로 더욱더 잘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

마을에 쓰레기 매립지가 들어서고 육군 공수부대 낙하훈련장이 들어설 예정이라 마을 주민들끼리 사소한 다툼이 있었지만 이런 일들이 조속하게 마무리 되어 다시금 정이 넘치고 화목한 온정이 가득 넘치는 삼용2리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항상 마을에 일이 있으면 팔을 걷어부치고 도와주시는 마을 주민분들이 있어 늘 감사합니다. 작은 마을이지만 더욱더 노력하여 다같이 잘사는 우리마을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영신  용당리노인회장
박영신 용당리노인회장
“올한해도 풍요로움이 가득하길.”

노인회 회원이 예전엔 80여명이었지만 현재 18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두 합심하여 마을사람들을 끌어 주려 노력하는 우리 노인회 회원들에게 언제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새해에는 노인회원과 주민들 모두 건강하고 농사도 대풍하고 언제나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풍요로움이 가득한 용당리를 위해 앞으로도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장세현  행정리노인회장
장세현 행정리노인회장
“ 인심과 단합으로
똘똘뭉친 노인회를 만들어 갑시다. ”

노인회 회원들이 15명 정도로 회원수가 매우 적지만 인원이 적은 만큼의 장점이 있습니다. 바로 서로의 사정을 잘 알아 배려해주기 쉽고 단합도 쉽다는 점입니다. 앞으로도 똘똘뭉쳐 우리 노인회를 아기자기 하게 잘꾸려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새해에는 다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김성환  개발위원장
김성환 개발위원장
“마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 보일 터 ”

영동이 고향이지만 항상 외지에서 생활하다가 삼용2리로 들어온지 10여년이 흘렀습니다. 마을 정비가 타 마을에 비해 상당히 잘 되어있는 편이지만 아직 미흡한 곳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더욱더 마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새해에는 더욱더 많은 성원 부탁드리고 다들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주창순 부녀회장
주창순 부녀회장
“농사일이 항상 바쁘지만 많은 협조와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얼마전 몸이 안좋아 수술했지만 마을 여러분들의 성원에 많은 회복이 이루어져 그동안 못한 부녀회 활동을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마을이 작아 인원은 18명 밖에 되진 않지만 마을의 모든 부녀회 활동을 서로 자기일인양 도맡아 해주시는 부녀회 회원들에게 언제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도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주연식 새마을지도자
주연식 새마을지도자
“항상 솔선수범하는 마음으로 ...”

조촌리가 고향이지만 62년에 서울로 상경하여 30여년을 건설업에 종사했지만 사고로 큰 수술을 받고 역시 내가 있을 곳은 고향이라며 이곳 삼용2리로 귀향을 결심했습니다. 처와의 사이에서 3남매를 두고 이제 60이 넘은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젊다고 생각하고 마을일이 있다면 항상 앞장서서 솔선수범하는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올한해도 마을주민들의 많은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리동네 가볼만한 곳 - 장충범(?~1597) 신도비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 산소날에 있는 장충범(?~1597)의 묘소 입구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장충범은 조선의 충신으로 본관은 단양, 자는 효칙. 임진왜란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로서 왜군과 싸우다 부상하고 선조 30년(1597년)에 삼생리 구진터에서 왜군과 분전하다 순국 하였다. 선조 38년(1605년)에 전지로 녹권이 하사되고 철종 8년(1857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의 충신정려(忠臣旌閭)가 내려졌다.
이 비에 대해 재밌는 구전설화가 있는데, 장충범이 삼용리에서 의거할 것을 결심하고 병마를 준비하니 30여명 정도였다. 오합지졸인 이 민병 30여명은 병장기도 변변하지 못해 곡괭이와 쇠스랑, 몽둥이 등을 들고 싸웠는데, 왜군은 신식무기인 조총을 들고 민병들을 순식간에 모두 순사시켰다.
장공이 이 구진터에서 전사하자 장공의 애마는 그 주인의 웃옷을 입에 물고 한숨에 고향인 음성 삼생리 옛집으로 달려와서는 마당을 빙빙 돌면서 소리내어 울어 장공의 부인에게 장공의 전사 소식을 알렸다.
이후 부인이 장공의 애마를 정성껏 거두어다 그가 명을 다하고 죽자 후히 장사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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