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향교, 골수 친일파 ‘이해용 공덕비’철거
음성향교, 골수 친일파 ‘이해용 공덕비’철거
  • 한인구 기자
  • 승인 2019.05.03 15: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매국노 이완용의 6촌 동생…30여 년간 일본 관료로 친일 행각
‘유림독립항쟁 파리장서운동’ 10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거행
음성향교 앞뜰에 세워져 있던 ‘이해용 공덕비’가 철거된 후 빈자리로 남아 있다.
음성향교 앞뜰에 세워져 있던 ‘이해용 공덕비’가 철거된 후 빈자리로 남아 있다.

 

음성향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시점에서 ‘유림독립항쟁 파리장서 운동 100주년 기념식’을 열고, 지난 90년간 향교건물 앞뜰에 세워져 있던 골수 친일파 ‘이해용 공덕비’를 철거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해용은 구한말 대표적 매국노인 이완용의 6촌 동생으로 30여 년간 일본의 관료로 활동하며 민족 탄압에 앞장서 온 대표적인 친일파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친일 행적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유림독립항쟁 파리장서 운동’은 3·1운동 당시 전국의 유림들이 이에 적극 호응해 유림대표 137명이 장문의 ‘대한제국 독립청원서’에 서명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운동이다. 당시 이를 주도한 500여 명의 유림들이 옥고를 치르는 등 탄압을 받았던 유림의 대표적 독립운동이다.
음성향교는 지난달 16일 음성향교 앞에서 음성지역 유력인사들과 뜻있는 군민들이 모여 ‘유림독립항쟁 파리장서 운동 100주년 기념식’을 열고, 그동안 향교 앞뜰에 다른 인사들의 공덕비와 함께 세워져 있던 골수 친일 관료인 이해용의 공덕비를 철거하는 행사를 가졌다.
친일파 이해용은 이완용의 후광으로 1911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조사과 서기로 근무하다가 1918년 일본 경찰이 돼 5월에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부로 임명됐고 이어서 9월에는 경기도 강화경찰서 경부(경찰서장 직위)로 발령 받은 후 본격적으로 반민족 행위를 저질렀다. 
이후 경찰에서 나와 관직에 등용돼 음성군수(1927년 3월), 제천군수(1929년 4월), 괴산군수(1930년 4월), 영동군수(1932년 11월), 청주군수(1936년 11월)로 부임해 충북지역에서만 오랫동안 민족 수탈에 앞장서 온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과 ‘훈6등·훈5등 훈장’을 수상했으며, 1940년 4월에는 중일전쟁에 협력한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훈5등 쌍광욱일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번에 철거된 ‘이해용 공덕비’는 음성향교 앞뜰에 세워져 있는 10여 개의 공덕비 사이에 세워져 있던 것으로 그가 음성군수를 마치고 제천군수로 부임해 간 1929년 6월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음성군 주민들은 그동안 친일파인 이해용의 공덕비가 민족정기가 흐르는 음성향교 앞뜰에 버젓이 서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향교 측에 지속적으로 철거를 요청해 왔으나 여러 가지 절차 문제 등으로 지체돼 오고 있었다.
이날 ‘유림독립항쟁 파리장서 운동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서 ‘이해용 공덕비’가 철거되는 것을 목격한 주민들은 “이제야 음성지역의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게 됐다”며 감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장남훈 유림대학장은 “‘유림독립항쟁 파리장서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시점에서 대표적 친일파 중 한 사람인 ‘이해용 공덕비’를 철거하게 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며 “이를 계기로 음성 향교가 더욱 군민들의 마음에 애국심을 불러 일으켜 주는 귀한 단체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