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왕읍 삼봉1리 한삼마을
금왕읍 삼봉1리 한삼마을
  • 김진수
  • 승인 2009.11.2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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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린고비 정신으로 근검절약의 전통 이어가 …


근검절약의 표상, 자린고비 이야기 발생지, 금왕 삼봉1리 '한삼마을'을 찾았다.

삼봉1리는 금왕읍 서남쪽으로 8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삼봉1리를 찾아가는 길은 다음과 같다. 금왕읍 소재지인 무극리에서 82번 도로를 따라 대소 금왕IC 방향으로 3.5km 지점에 오선사거리가 있다. 오선사거리에서 513번 도로 진천,덕산 방면으로 4.5km 정도 가면 유포리 보건소 진입로 맞은 편으로 삼봉1리 표지석이 서 있다. 이 표지석을 따라 700m 정도 들어가면 한삼마을, 음달말 입구에 자리한 삼봉1리 생활관을 만나게 된다.

한가위 명절을 앞두고 마을 생활관에서 모여 앉아 쏟아놓는 삼봉1리 주민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보자.

▣ 100여 주민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농촌마을
삼봉리는 본래 충주군 금목동면 지역이었다. 그런데 고종 10년(1906년) 음성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삼리, 정단리, 봉계리, 한삼리 일부와 맹동면 개현리 일부가 병합되었다. 마을 이름은 한삼(閑三)의 '삼'자와 봉계(鳳溪)의 '봉'자를 따서 삼봉리(三鳳里)라 하고 금왕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 금왕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금왕읍의 한 리가 되었다.
삼봉1리는 음달말, 양달말(한삼 마을), 증산말, 거루(렁)목 4개의 자연부락이 있었었다. 하지만 동서고속도로 금왕IC가 들어서면서 거루목에 살던 주민들이 다 이사를 나왔다. 졸지에 자연부락 하나가 송두리째 없어지고 말았다.
삼봉1리 가구는 46세대, 남자 51명, 여자 49명, 총 100명의 주민이 현재 살고 있다. 주민들 인구분포를 보면 조손가정 아이들이 7명, 50대가 2명, 그 외 주민 대다수는 60대 이상이다. 주민들은 쌀, 인삼, 고추 등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주민들 대부분은 고령화돼서 비닐하우스에 의한 특수작물을 재배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불가능하다.

▣ 주민과 출향인들 마을에 대한 자부심 대단
삼봉1리 한삼마을은 원래 한양조씨 집성촌이었다. 삼봉리 출신 유명 인사로는 무엇보다 자린고비로 유명한 조선시대 조륵 공을 꼽을 수 있다. 또 근대에 들어서는 해군의무감이었던 고 조성두 씨가 있다. 부자마을인 삼봉리 주민들은 일찍이 자녀들을 서울이나 청주로 교육차 내보냈다. 그 덕분에 삼봉리 출신 가운데는 대학교수와 초·중·고등학교 교사들이 많다고 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조성욱 이장이 13년간이나 이장을 맡아 기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이 연세가 많아도 다들 마을 일에 솔선수범해서 협조해 주시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특히 건강관리실(마을회관)을 신축할 때, 조성묵 씨 등 출향인들이 협조해준 점은 주민들 모두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출향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마을행사를 보면, 매년마다 대동계를 12월 20일쯤 하는데, 윷놀이를 통해 주민화합의 장을 마련해오고 있다. 또한 노인잔치는 여느 동리와 조금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오선초등학교 학구인 삼봉리를 비롯한 9개리가 매년 돌아가며 순번으로 5월 8일에 노인잔치를 공동으로 주관하고 있다. 또 자체적으로 초복 때마다 노인회원들에게 영양탕을 봉양하고 있다. 이때는 삼봉리와 자매결연 맺은 유촌리 '연상 식품'에 후원을 받아서 시행하고 있다.

▣ 주민화합으로 깨끗한 전원마을 지켜 가고파


기자가 마을 숙원사업을 묻자, 조 이장은 “한삼 마을과 달리 증산마을은 상수도시설이 아직 설치되지 않아 수질오염 때문에 상수도공사가 시급하다. 이를 해결하고 싶다”고 밝혔다. 또한 버스가 삼봉1리에서 2리를 경유하지 않는다. 그래서 노인들이 2~3km 걸어야 한다. 그렇기에 버스 및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 아주 불편하다. 이것 역시 개선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삼봉리에는 중소공장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인근 부락에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다. 특히 봉현리에 들어선 폐기물소각장 때문에 주민들은 항상 불안에 떨고 있다. 태생공단이 들어서서 이 폐기물소각장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를 주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조 이장은 “출향인들이 고향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하며, 사업마다 번성하고 가정이 두루 평안하여, 기회 닿는 대로 마을을 찾아 협조해 줄 것을 부탁 드린다”고 말했다. 또한 연세 많으신 주민들이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말했다.
특히 주민들이 쌀값을 물어올 때면 이장으로서 말씀 드리기가 죄송할 정도로 쌀이 천대받는 현실을 가슴 아파했다.

취재를 마치고 가을햇살 가득한 황금들판, 자린고비 마을을 벗어나는 기자의 뇌리에 마을생활관에 걸린 글귀가 스쳐갔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우/리/마/을/사/람/들/

조성욱  이장
조성욱 이장

마을 일에 솔선수범해 주는 마을 주민들에게 감사

조성욱 이장은 13년째 이장을 맡고 있으며, 동시에 금왕농협 이사를 맡아서 농민을 위해 불철주야 일하고 있다.
주민들이 고령화되었어도 마을 일에 솔선수범해 준 점에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으며 보람을 느낀다는 조 이장.
여행이 취미인 조 이장은 부인 김순옥 씨와 1남 1녀가 함께 여유있고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다.




조성주 노인회장
조성주 노인회장
선조를 잘 모시는 일이 가정 질서와 효의 근본

조성욱 이장 큰 형으로, 한양 조씨 종중회장을 맡고 있는 조성주 노인회장.
“30여 노인회원들 모두 건강하시죠”라고 인사하며, “삼봉1리는 젊은 주민들이 효를 다하여 노인들을 공경하는 마을”라고 자랑했다.
개인적으로 '선조를 잘 모시는 게 가정 질서와 효의 근본'이라는 의미인 '위선지가 만복지원(爲先之家 萬福之原)이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다.




조성덕 대동계장
조성덕 대동계장
이장과 노인회장 이하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보람

쌀과 인삼 농사를 짓고 있는 조성덕 대동계장은 마을 개발위원장을 동시에 맡고 있다.
조 대동계장은 “이장과 노인회장 이하 주민들이 적극 협조해줘서 마을일 하는데, 별 어려움 없이 보람있게 일하고 있습니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창희 새마을도자
박창희 새마을도자
가족같은 마을주민, 서로 감싸주고 화합 잘돼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박창희 새마을지도자는 10여년 전 공기좋고 인심좋은 삼봉리에 살려고 내려왔다고 한다.
삼봉리에서 버섯재배를 하다가 최근 건축일을 하고 있는 박 새마을지도자는 군에 복무하는 아들을 자녀로 두고 있다.
“삼봉리는 모든 주민이 가족같이 서로서로 감싸주며 화합이 잘되고 있다”고 마을 자랑을 했다.






김영숙 부녀회장
김영숙 부녀회장
화합 잘되고 모든 일에 협조해 주시는 마을분들께 감사

김영숙 부녀회장은 여주에서 시집온 지 34년, 부군인 조성덕 대동계장과 함께 5남매의 자녀를 기를 때가 가장 행복하고 보람있었다고 한다.
자녀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부모의 기쁨이라는 김 부녀회장은 40여명 부녀회원들에게 “화합 잘하고 동네 애경사 때 잘 협조해주셔서 감사하고, 보람있게 회장직을 맡고 있다”고 감사와 고마움을 표했다.





우리마을유적지 -
조륵선생 생가와 자린고비 기념비


조륵 선생(1649~1714)은 조선 인조 때 증부 참봉 조유증(趙惟曾)의 넷째 아들로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에서 태어났으며, 선생의 생가가 남아 있다.
선생은 평생을 부지런하게 일하고 절약하여 구두쇠라는 말을 들으면서, 만석군의 재산을 모았다. 선생은 회갑을 맞아 당시 전라·경상도 지역에 심한 가뭄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기근민들에게 그 동안 모은 재산을 아끼지 않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선생의 도움을 받은 기근민들이 선생의 고마운 뜻으로 공을 기리고자 자인고비(慈仁考碑)라는 송덕비를 세웠다. '고'(考)자는 나를 낳아준 사람도 부모지만 내가 죽게 되었을 때 도와준 것 또한 부모라 하여, 조륵 선생이 어려운 이들을 도와 살게 해 주었기 때문에 '사랑스럽고 어질기가 부모같다'는 뜻을 명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경상.전라 지방 관리들은 선생의 공을 조정에 상소하여 정3품에 해당하는 가자(加資)의 벼슬이 하사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내 남은 재산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을 뿐인데, 그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냐며 끝까지 벼슬을 사양했다고 한다.
평생 동안을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자신이나 후손들이 호의호식하지 않고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에게 아낌없이 도와주었던 선생의 근검 절약정신과 자선사업의 행적은 우리고장의 자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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