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서 좋다 ‘딸 같은 마을 대표’
여자라서 좋다 ‘딸 같은 마을 대표’
  • 임요준
  • 승인 2015.10.21 1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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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애 소이면 중동4리 이장
노동운동가에서 '상록수'의 주인공처럼 살기로
마을 어르신 돌보는 요양보호사 프로그램 도입

소이면사무소를 지나 괴산군 불정면으로 향하다 보면 도로변에 세워진 '갈마절' 간판을 발견한다. 옛 갈마사가 있다해서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마을 입구부터 양옆으로 거대한 비닐하우스를 맞이한다. 수박과 멜론을 재배하는 하우스다. 길게 뻗어진 산줄기가 포근히 안고 있는 전형적인 시골 농촌마을이다. 그곳에 인생역경을 딛고 농촌을 깨우는 한 여성이 있다. 소이면 중동4리 안순애(60) 이장이 그 주인공이다.

평양이 고향인 부모님은 6.25전쟁 때 피난 내려와 인천 만석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기를 3년 후, 1남 5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려운 형편에 언감생심 학업은 꿈도 꿀 수 없다. 7세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은 어찌했는지 기억도 없다. 13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는 생존시장으로 내몰리고 만다.


권력에 내몰려 노동운동가로
건빵공장에서부터 안 다녀본 회사가 없다. 16살 때 당시 대기업에 속한 동일방직에 취업했다. 그토록 입사하고 싶었던 회사였지만 그녀의 파란만장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회사 노조가 설립되면서 그녀는 노조 핵심인물로 떠오르게 됐고, 결국 입사 8년만에 해고를 당하고 만다.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권력자 어느 누구도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한국노총 최초 여성집행부로 활동했다. 그녀 나이 겨우 19세때다.


노동운동가에서 농부로 변신
“전쟁과 같은 도시와 달리 시골 충주는 참으로 평화로웠습니다. 맑은 공기에 한적한 농촌풍경은 인천과는 다른 세상 이였습니다. 불평불만도 없는 평온한 곳 이였습니다. 천국과 같은 이런 곳에 살고 싶었습니다.”

동료의 도움으로 충주로 이주한 안 이장은 동료의 소개로 남편 신한철(60) 씨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37세 노처녀가 뒤늦은 결혼에 골인한 것이다. 딸 송희(22)를 두고 있다.

남편 신 씨가 현대건설을 퇴사하면서 그녀는 고추농사를 위해 음성읍 용산리로 이주, 음성과 인연은 시작됐다. 2년 뒤 지금의 소이면 중동4리로 이주, 본격적인 수박농사가 시작됐다.

“새벽 4시에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낮 12시가 돼야 겨우 나와 밥을 먹었습니다. 하우스 30동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농사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습니다. 처음에 느꼈던 농촌 풍경과 현실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농부들의 수고는 공장노동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농업·농촌현실에 가슴 아려
그녀가 직접 본 농촌현실은 참담했다. 대출 연 이자 24%에 빚 없는 농가가 없을 지경이다. 적게는 수천만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빚에 헉헉대는 농민들. 빨간 딱지에 놀라 넘어지는 할머니들…농촌은 죽음의 밭 그 자체였다.

“농협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만이 농민을 살릴 수 있는 길 이였습니다.”

농협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의원 선출에 출마를 결심한 그녀는 마을 대동계장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외지인에 대한 경계와 게다가 여자가 아닌가? 삶 속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성실함에 대동계장은 승낙했지만 마을 어르신들의 반대는 바위와도 같았다.

“어디 남자가 없어 여자를 대의원에 내보내나?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멈출 그녀가 아니다. 어르신 한분 한분을 설득 끝에 대의원에 선출됐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여성농민들을 조합원으로 이끄는 것. 대개는 200만 원의 출자금을 납부해야 하지만 여성들의 조합원 진출을 위해 20만 원 출자금으로 가능하게 했다. 아줌마조합원이 탄생하면서 농협에서 여성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게 된 것이다.


이장당선…행복학습센터 운영
그러던 지난 2013년, 마을 이장 선출이 있던 날. 마을회관에 60여 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이장 선출 추천을 주민들로부터 받기 시작했다. '안순애' 이름 석자가 2명의 다른 후보와 함께 올려졌다. 드디어 투표가 시작됐다. 결과는 '안순애' 당선.누구도 예상 못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당선 후 3년이 흘렀다. 안 이장은 올해 재임됐다. 마을은 행복학습센터로 지정, 변화를 꾀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국화분재를 시작, 올 가을 전시회를 앞두고 있다. 마을 입구부터 가꿔진 꽃들로 예쁜 마을만들기에 선정돼 받은 상금으로 휴식처 원두막을 지었다. 일 4회 운행되던 버스를 9회로 늘렸다. 멀리 떨어진 버스승차장을 마을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어르신들의 시내 나들이가 그만큼 편리해 졌다. 요가, 노래교실 등 주민의 삶의 질 향상에 깃발을 세운 것이다.

특히 농촌 노인들의 건강을 위해 요양보호사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멀리 있는 자녀보다 가까운 이웃의 도움이 절실한 현실에 꼭 필요한 제도다. 주민이 요양보호사가 돼 옆집 어르신을 돌보는 것이다.

“이장이 할 일이 참 많더군요. 또 맡을 생각은 없지만 하길 잘 했어요. 여자이기 때문에 더 세심하게 볼 수 있었고 주민들의 가려움을 긁어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은 1년 임기동안 침체된 부녀회를 더욱 활성화 할 계획입니다. 농삿일은 여자없이는 어렵습니다. 아줌마조합원의 힘으로 농업기술을 익히며 농촌이 변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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