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의산’ 아래 위치한 천혜의 마을
수레의산’ 아래 위치한 천혜의 마을
  • 안창규
  • 승인 2015.07.2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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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극면 차평2리-본말, 담사리, 양재

차평저수지·관정시설 양호…“한해 걱정 없어요”
이구령 충절문·성주 이 씨 열녀문 '마을의 자랑'

▲ 차평저수지 제방에서 내려다본 차평리 마을은 여유롭고 평화스러워 보인다.
▲ 차평저수지 제방에서 내려다본 차평리 마을은 여유롭고 평화스러워 보인다.


▲ 수레의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을 담고 있는 차평저수지. 마을을 풍요롭게 하는 근원이다.
▲ 수레의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을 담고 있는 차평저수지. 마을을 풍요롭게 하는 근원이다.


▲ 조선 후기 김선경의 처 성주 이 씨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열녀문
▲ 조선 후기 김선경의 처 성주 이 씨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열녀문

충주에서 금왕을 거쳐 이천으로 달리는 3번국도 변에 자리한 생극면 차평리는 인근에 위치한 수레의산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한다. 해발 679m인 수레의산에는 모양이 특이한 상여바위가 있다. 상여바위가 멀리서 보면 하늘로 오르는 상여의 모습과 같다고 해 옛날에는 '차(車)의 산'이라는 뜻으로 '차의산(車依山)'이라고 하였고 한글로는 '수레의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수레의산은 인근의 원통산·수리산·부용산·큰산 등과 함께 음성군 북쪽 끝 오갑산에서 갈라진 노령산맥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산줄기 상에 있다.

'차평리'라는 수레의산 밑에 있는 들이라는 의미로 '수레들' 또는 '차평(車坪)'이라 불리었다. 본래 충주군 생동면에 속해 있던 지역이었으나 1906년 음성군에 편입됐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말마리 일부를 병합해 '차평리'라 하고 생극면에 편입됐다.

차평리는 생극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차곡리, 서쪽으로는 송곡리, 남쪽으로는 신양리, 북쪽으로는 방축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2개의 행정리(차평1리, 차평2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차평2리에는 본말(본동)·양재·담사리 등 3개의 자연 마을이 있다.

차평2리 전체 주민은 120가구 400여 명이다. 본말 50여 가구, 담사리 40여 가구, 양재 30여 가구 등이다. 초·중·고교생 18명을 제외하고, 5~60대가 절반, 7~80대가 절반 정도로 생극면에서는 연령층이 가장 낮은 편이라고 한다. 최근에 귀농·귀촌 바람으로 공가가 있는지 묻는 외지인의 문의가 심심치 않고, 전체가구 수도 많지는 않지만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특이한 점은 다른 농촌마을과 달리 농업에 종사하는 가구 수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반면 기업체에 근무하거나 자영업을 하는 가구가 꽤 많다.

이 마을에서 주로 재배되는 농작물은 수박, 복숭아, 벼, 시설작물 등이다. 시설작물은 오이, 호박, 메론 등이 주를 이룬다. 수확된 농작물은 다양한 브랜드로 출하된다. 수박은 '허브', 복숭아는 '헷사례', 쌀은 '다올찬' 등이다. 마을환경은 축사가 없어 쾌적하다.

가뭄에도 재해 걱정 없어

예년과 달리 지난 5~6월 비가오지 않아 적지 않은 가뭄 피해가 발생됐다. 하지만 차평리 만큼은 그런 걱정이 전혀 없다. 마을 동쪽 수레의산에서 흐르는 계곡물을 차평저수지에 충분하게 가두어 놓았을 뿐 아니라, 넉넉한 지하수를 활용할 수 있는 관정시설이 아주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는 매년 12월 열리는 대동계와 4월의 경로관광, 그리고 초복 맞이 전체 마을식사 등 여러 차례 행사가 열린다., 이 마을은 주민들의 화합이 잘 된다고 한다. 때문에 행사는 훈훈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치러진다.

이런 마을분위기에 맞춰 마을에 입주한 기업체 중 3~4개 업체가 상당한 후원을 하고 있다. 그중 버섯재배를 하는 한 업체는 마을의 행사와 운영비조로 적지 않은 금액을 후원하고 있어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는다.

임진왜란의 두 유허지(遺虛址)

마을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두 유허지가 있다. 이구령 충절문과 김선경의 처 성주 이 씨 열녀문이다.

이구령(李龜齡) 충절문은 음성군 출신으로,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자(字)는 응지(應之)이며 호(號)는 도담(道潭)인 이구령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구령은 중봉 조헌(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박식하고 성실한 인물이라 천거되어 관직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1597년 금산(錦山) 수남(樹楠)에서 적을 공격하던 중 순절하였다. 광무9년(1905)에 명정되었고, 차평리의 충절문은 1980년에 세워졌다.

또 다른 유허지는 사담리에서 본말이나 양재, 차평저수지로 올라가는 차도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 김선경의 처 성주 이 씨 열녀문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주 이 씨는 군자감판관으로 있던 남편 김선경이 전쟁터로 나가자 딸을 데리고 피난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생극면 차곡리에 있는 수리산으로 피난했으나, 이곳도 안심할 수 없게 되자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차평리 통산 밑을 지나다가 왜적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 씨가 딸을 안고 어쩔 줄 몰라 전전긍긍하는데 왜적이 이리 떼처럼 덤벼들어 이 씨를 강제로 끌어안고 가슴을 만지고 손목을 잡아당기며 희롱을 하였다. 이 씨 부인은 딸을 껴안고 짐승처럼 덤비는 왜적에 반항했으나 여자의 몸으로 적을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뜻밖에도 힘센 장사가 나타나 왜적을 쳐부수어 다행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젊은 장사는 당시 주부벼슬을 하고 있던 하진민이라는 사람이었다. 이 씨 부인은 백배 사례하고, 딸을 아내로 삼아 달라고 청한 다음 왜적의 손이 닿았던 젖가슴과 손목을 칼로 잘라 버리고는 그 자리에서 자결을 하였다. 그 순간, 부인이 자결한 자리에 오색영롱한 서기가 수일을 감돌아 세상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였는데, 훗날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고 한다.

차평저수지 제방에서 내려다보는 차평리 마을 풍경은 주민들의 마음만큼이나 여유롭다. 수레의산에서 흘러내린 푸른 물을 묵묵히 담고 있는 저수지가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우 / 리 / 마 / 을 / 사 / 람 / 들




바쁜 와중에도 마을일 최우선 처리

6년 째 이장을 맡고 있는 이문희(52) 씨는 하우스 20동에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매년 2월부터 11월 얼음이 얼기 시작할 때까지의 삼모작 수박재배로 바쁜 나날을 보내지만 마을 일은 최우선으로 처리한다. 슬하에 2남을 두고 있다. 장남은 고려대(정보통신), 차남은 서울대, 경찰대, 아주대에 모두 합격했지만 의과대를 가기 위하여 아주대에 진학했다고 한다. 차기 이장직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 하지만 주민들이 허락하지 않을 분위기다.



35년 자전거포 운영한 차평리 토박이

김명수(80) 노인회장은 차평리 토박이로 줄곧차평리에 거주하며 외지로 나가 본 적이 없다. 35년 동안 마을에서 자전거포를 경영했다.

자녀 3남 중 장남이 가업을 이어받아 마을에서 자동차정비업을 하고 있으며, 2남, 3남은 지방에서 기업체에 근무하고 있다.

6년 째 마을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는데, 지자체로 부터의 지원이 적어 애로사항이 있다고 했다.


이장과 함께 궂은일 도맡아 처리

이재근(70) 마을 총무는 올해로 6년차다. 고추농사를 짓고 있다. 자녀들은 전부 외지에 따로 독립하여 살고 있다. 두 내외만 차평리에 거주한다.

차평리 토박이인 그는 이문희 이장과 함께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한다.

그는 “마을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이문희 이장이 최고”라며 “다른 사람에게 이장을 넘긴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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