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함흥차사’ 품은 버드나무 마을
마지막 ‘함흥차사’ 품은 버드나무 마을
  • 안창규
  • 승인 2015.06.26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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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면 오류1리-오류골

▲ 오류골 마을 안 전경. 교통량이 무척 많은 중부고속도로와 82번 지방도를 벗어나면 바로 오류골의 마을 안으로 접어든다.
▲ 오류골 마을 안 전경. 교통량이 무척 많은 중부고속도로와 82번 지방도를 벗어나면 바로 오류골의 마을 안으로 접어든다.

박순 충민묘 · 부인 장흥 임 씨 열녀문 합설
주변 대소산단 · 대풍산단 들어서 크게 변모

알게 모르게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또한, 조선 태조 이성계와 '함흥차사'에 관련한 이야기도 대부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함흥차사가 몇 명이었으며, 마지막 차사가 음성군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태조의 5남 이방원(3대 태종)은 왕자 형제들을 살해하고 둘째 형인 이방과(2대 정종)의 2년 간의 짧은 재위에 이어 조선왕에 오른다. 이 과정에서 아들 방원의 잔학한 형제간 살육을 지켜본 태조는 옥새를 들로 고향 함흥으로 가서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태종은 아홉 번이나 함흥으로 신하들을 보내어 환궁할 것을 탄원했지만 9차례 보낸 차사(差使) 모두가 태조와 그의 추종세력에 의해 살해당하고 한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이른바 갔지만 돌아오지 않는 '함흥차사'들이다.

10번째로 목숨을 건 차사 소임을 자청한 사람이 박순(朴淳)이다. 고려 말 요동정벌 때 이성계의 휘하에서 종군하며 이성계와는 전쟁터에서 이승과 저승을 초월한 전우이자 친구였다. 음성박씨의 3세손인 그는 태조를 한양으로 돌아오게 한 마지막 차사였다. 하지만 그도 우여곡절 끝에 태조를 한양에 돌아오게는 하였지만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태조와 태종, 두 왕은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여 공신으로 봉하고 화공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도록 하였다. 태종은 그의 초상화를 태조에게 진상하였다. 한편 박순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결한 부인 장흥 임씨에게는 정경부인을 추증하였다. 오류1리 오류골에는 박순을 기리는 충신문인 충민묘(忠愍廟)와 부인 장흥 임씨의 열녀문이 합설되어 있다.

▲ 박순 충신문은 1686년(숙종 12년) 삼성면 상곡리에 세워졌으며 1886년(고종 23년)에 중수하였다가 쇠락하자, 1970년 오류1리로 옮겨 충효열각으로 합설하여 세워졌다.
▲ 박순 충신문은 1686년(숙종 12년) 삼성면 상곡리에 세워졌으며 1886년(고종 23년)에 중수하였다가 쇠락하자, 1970년 오류1리로 옮겨 충효열각으로 합설하여 세워졌다.

남북으로 오류천과 성산천 흘러


대소면(大所面)은 대조곡면(大鳥谷面)과 소탄면(所呑面)에서 '대'자와 '소'자 각 한자씩을 따서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본래 충주군 지역이며, 고려 때 대조곡처大鳥谷處가 있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대조곡면(大鳥谷面)이라 하여 생동(生洞)·태티(泰峙)·소당(韶堂)·석격(石格) 등의 10개 동·리를 관할하다가 1906년 지방 행정구역 정리에 의하여 음성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주군 소탄면의 본리(本里)·성산(城山)·부윤(富潤)·상태(上台)·하태(下台)·신촌(新村) 등의 6개 동·리와 사다산면(沙多山面)의 오상(五上)·오중·오하·오삼 등의 15개 동·리, 삼기면의 법평리와 용산리의 각 일부 그리고 진천군 만승면(현 광혜원면)의 검성리·사산리·광동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대소면이 되었다.

대소면 오류1리인 오류골의 유래는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은데서 유래한다. 마을 동쪽으로는 야트막한 안산이 있고, 마을 남북으로 오류천과 성산천이 흐른다. 두 개천은 남쪽의 삼호리에서 미호천과 합류한다. 마을주변은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농경지가 무척 넓다.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아 오류골

중부고속도로가 마을 서쪽 끝을 지나가고, 근래에는 주변에 대풍-대소 두 산업단지가 들어서 마을 입구 주변이 꽤나 어수선하고 소란스럽게 변모하였다. 그러나 마을 안쪽의 야트막한 산을 넘어서면 드넓은 평야의 농경지가 펼쳐진다.

오류골은 한때 원주민이 60가구가 넘었지만 조금씩 줄어 지금은 50가구에 주민 140여 명의 단일 마을이다. 원주민의 가구 수는 늘고 있지 않지만, 주변 공단에 취업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의 원룸이 계속 늘고 있어 총 가구 수가 꽤 되리라는 전명관 이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외국인 근로자가 주민등록, 혹은 다른 법적 절차를 하고 거주하는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근래 1~20년 사이에 마을 주변에 산업단지가 입주하여 농경지를 많이 잠식하였다. 그러다보니 주민의 절반이 채 않되는 20여 가구 만 농사를 지으며, 그 중 2가구는 하우스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과수나 축산 농가는 없고, 나머지 30여 가구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최고령은 91세 주민으로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고, 초등학생이 8명, 중·고생이 10명, 주민연령층이 높은 편이지만 다른 마을보다는 중장년층이 고루 분포돼있다.

주변 산업단지 입주로 마을모습 변화

매년 말 온 주민이 모이는 대동계나 경로당의 현황 등은 다른 마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애향회'가 조직되어있는 점이 색다르다. 60세 미만의 23명의 주민이 회원으로, 김광식 씨가 회장이다. 1400만 원 상당의 기금도 적립돼있다. 매년 초복-말복 사이에 마을 어른들을 포함한 전 주민이 참여하는 마을잔치가 성대히 치러지는 데, 이 잔치를 애향회가 주관한다.

오류골 출신 인사가 운영하는 인근의 한 업체에서 대동회 등 마을의 크고 작은 행사 때 찬조금 등 이런저런 도움을 받고 있는 이외에 다른 기업체로 부터의 후원은 없다. 오히려 2년 전에 마을 가장 높은 곳으로 이전하여 온 한 업체로부터 소음과 분진이 발생하여 마을 주민들과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마을 한 주민이 거주하는 가옥과 업체 사이의 담장이 얇은 함석으로 되어있어 그대로 피해를 받고 있다.

마을 현안문제를 묻자 “없다”며 손사래를 치던 전 이장은 마지못한 듯 “오류1, 2리 행정구역 분할로 두 마을 사이의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부분이 있다”고 어렵게 말했다. 아무쪼록 두 마을의 이해관계가 빠른 시일 안에 원만히 해결되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마을을 나섰다.

미니인터뷰

전 명 관  이장
전 명 관 이장

“단합 잘되는 마을을 위해 최선”
전명관(49) 이장은 금년 3년 임기의 이장을 처음으로 맡았다. 3대째 오류골에서 살고 있는 토박이로 초등하교-중학교는 대소에서 다녔고,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마쳤다. 어머니를 모시고 부부 내외와 1남2녀, 5가족이 생활하고 있다. 논농사 110마지기(2만2000평)와 밭농사 1000평을 경작하고 있어 오류골에서는 대농으로 통한다. “이장으로써 마을의 대소사 현안을 챙기는 것이 생각했던 것 보다 어렵다”며 “차기 이장은 사양하겠다”는 농담반, 진담반의 고충을 털어 놓았다. 그러면서도 “단합이 잘되는 마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도 했다.



장 재 만  노인회장
장 재 만 노인회장
3대째 거주하는 본토박이 어르신

장재만(79) 노인회장은 “마을에 자랑할 것이 별로 없다”고 말을 떼는 장 노인회장도 3대째 오류리에 살고 있다. 자녀들은 전부 독립했고, 두 내외만 거주하고 있다.
“41명의 노인회 회원이 있지만 성한(몸에 병이나 탈이 없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주민 모두가 단합이 잘 되어 살기 좋은 마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소박한 희망을 피력했다.



박 형 근  총무
박 형 근 총무
마을 현안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

박형근(67) 마을 총무는 2년 째 소임을 맡고 있다. 이장, 노인회장과 같이 대대로 오류리에 뿌리를 내린 토박이로 두 내외와 함께 4·5세의 두 손녀를 돌보고 있다.
아들 내외는 서울에서 맞벌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얼마간의 농사를 지으며, 마을의 총무로써 부지런히 전 이장과 더불어 마을 현안을 챙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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