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욱 음성군산림조합장
최상욱 음성군산림조합장
  • 이상훈대표
  • 승인 2009.09.0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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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대표기자의 취중talk! 네번째 손님


1977년에 산림조합에 입사해 음성군산림조합 상무를 거쳐 상임이사, 제14대 조합장으로 재직하면서 산림조합의 산증인으로, 그리고 앞으로 제15대 음성군산림조합장으로 막중한 소임을 맡고 당선증을 막 교부받은 최상욱 음성군산림조합장을 서둘러 만났다.
어렵게 마련한 사석이니만큼 30년이 넘는 기간을 산림조합이라는 성을 쌓아가며 살아 온 그이지만 오늘은 공식적으로 비쳐지는 산림조합장의 모습 보다는 인간 최상욱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청해 들어보기로 했다.

Q 우선 연임하시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하루 축하받으시느라고 바쁘셨을 텐데 당선증을 받고 처음으로 하신 일이 뭔가요?
A 북어 한 마리랑 소주 한 병을 들고 할아버지 산소에 갔었습니다. 앞으로 4년도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왔지요. 처음 산림조합에 입사할 때 할아버지께서 저를 불러 앉히시고는 항상 겸손하게 살라고 당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Q 당선증을 받으셨으니 3,000여 조합원들에게 각오 한 말씀 하시지요.
A 오늘날까지 산주와 조합원 여러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 군은 농업군으로 풍요로운 과일과 고추, 인삼 등 특산물이 많이 나지만 임산물 소득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앞으로 산주들의 이익 창출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Q 어렸을 때 이야기 좀 해 주시지요.
A 지금도 그렇지만 제가 태어난 곳은 한 집안이 모여 사는 씨족공동체입니다. 할아버지가 3형제셨는데 종손이라고 어려서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그 땐 뒷집을 가려면 저희 집 앞마당을 거쳐야 해서 증조할머니께서 드나드는 사람을 다 챙기셨지요. 그런데 한 번은 동네에 도둑이 들어 세 집이 몽땅 털린 적도 있습니다. 정말 어렵던 시절이어서 아버지나 삼촌, 당숙 모두 외지로 일하러 가시고 집안에 여자들과 아이들만 남았었는데 끼니꺼리가 없어서 걱정하던 기억이 납니다.

Q 종손이면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라셨겠네요.
A 그렇지요. 삼촌 덕에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해서는 공부를 제법 했는데 3학년 때 삼촌이 군대에 가는 바람에 졸업할 무렵이 되니 공부를 너무 못해서 집안이 난리가 났지요. 그런데다가 제가 몸집도 작고 허약하니 작은 아버지가 한 해만 더 있다가 중학교에 가라시더군요. 그 당시에 중학교를 가려면 산길을 2시간 30분을 걸어 다녀야 했거든요. 그래서 1년 후에 중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아무튼 그렇게 걸어다닌 것이 운동이 많이 되었나 봅니다. 키도 1년에 15㎝나 크고 건강해졌습니다. 그렇게 중학교를 잘 마치고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지요.

Q 그때부터 임도를 만들고 다니셨네요. 그럼 고등학교 시절은 어떠셨나요?
A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두 번째 등록금을 낼 때가 다가왔는데 어른들이 하시는 이야기를 얼핏 들으니 등록금 낼 돈이 없어서 어디서 빌려야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는 도저히 안되겠더라구요. 동생들도 있는데 내 욕심만 차릴 수는 없다 싶어서 부모님께 말씀도 안 드리고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께 그만둔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굉장히 인자하신 분이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등록금을 대신 내줄테니 고등학교라도 마치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도저히 안되겠더라구요. 일단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Q 서울엔 연고가 있으셨나요?
A 어머니의 고종사촌 동생이 사셨는데 밥이라도 제 때에 얻어먹으라고 미곡상에 소개를 시켜 주었습니다. 나이도 어렸으니 달리 취직할 만한 곳도 없었구요. 그래도 고향에서 자전거 타고 산길을 다니던 실력이 있어 쌀 배달을 다녔어요. 그 쌀가게 사장님이 한 제강회사의 공장장이었는데 저를 지켜보시더니 “우리 집에서 일하면 몇 푼이나 받겠냐? 우리 회사에 가서 일을 해라”라며 취직을 시켜주셨어요. 그렇게 4년을 근무했는데 일이 적성에도 맞지 않는 것 같고 군대도 갈 때가 되어서 고향에 내려왔습니다.

Q 그럼 고향에 내려오자마자 바로 군대에 가신 건가요?
A 신체검사를 했는데 갑1종이 나왔어요. 그래서 영장이 나왔는데 마침 손을 다쳤지 뭡니까. 집합장소인 공설운동장엘 갔더니 손을 다쳤다고 집에 돌려보내며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하더군요. 그랬더니 주변에서 난리가 났어요. 군대 가기 싫어서 꾀병 부린다구요.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중1때부터 배구를 좀 했는데 3개군 체육대회에서 우승을 했거든요. 그래서 '나도 나중에 징집영장 나오면 갈거다' 했는데 국군통합병원에서 받은 재검에서 방위소집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집에 있다 보니 할아버지가 '종손인데 장가는 가야지' 하시면서 결혼을 서두르시더라구요.

Q 안그래도 여쭤볼 참이었는데 그럼 중매결혼을 하셨나요?
A 그렇지요. 그 때 바로 선을 보고 딱 20일 만에 손목 한 번 못 잡아 보고 결혼했어요. 마침 타작이 한창일 때였어요.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저희 집이 상당히 어려웠는데 제가 중학교 졸업하고 방황하는 사이에 아버님이 담배 농사를 지어 동생들 대학 공부를 시켜가며 해마다 땅을 조금씩 늘리셔서 열마지기 조금 넘게 농사를 지었습니다. 탈곡기로 이틀씩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 비가 와서 일을 못했어요. 동생들과 개울에 미꾸라지를 잡으러 갔는데 할아버지가 부르시더니 '오늘 선보기로 했다. 선보고 날 받으러 가자' 하시더라구요. 할아버지 연세가 많으셔서 종손인 제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으셨던 거지요. 그래서 그 날 선을 보고는 글방 선생님께 가서 날을 받는데 20일 안에 결혼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결국 어른들 성화에 선본지 20일 만에 결혼을 하게 된 거지요.

Q 그럼 산림조합과는 언제 인연을 맺으신 건가요?
A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았으니 생계를 꾸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돌아가신 산림과장님이 추천을 해 주셨는데 첫 시험에서는 낙방을 했어요. 그래서 다시 시험을 봐서 합격은 했는데 발령을 안내주더라구요. 그러다가 11월 말인가 12월 초인가에 발령을 내 주더군요. 그 때가 1977년도였는데 당시 장안우 조합장님이 친자식처럼 이끌어 주셨습니다. 중간에 사표를 두 번이나 냈었는데 조합장님이 '그냥 있어라. 언제든 마음 바뀌면 다시 와라' 하시며 사표 수리를 안해 주셨어요. 그래서 '내가 조합장님 만큼은 아니어도 정년까진 있어야겠다' 하고 생각했던 것이 오늘까지 연이 닿았습니다.

Q 그럼 줄곧 음성에서만 근무하신 겁니까?
A 아니요. 91년도에 보은으로 발령이 났는데 그곳엘 가보니 음성하고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요. 할 일은 산더미 같이 많은데 일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조합장에게 '내가 내 식대로 운영해 보겠으니 맡겨 달라'고 했습니다. 그 때 사업도 번창하고 조합이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보은에는 20개월 있었는데 당시 조합을 신축했어요. 그리고 나서 바로 음성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음성도 청사를 신축하게 돼서 현장을 감독했습니다. 건물을 두 채나 지은거지요.

Q 그 때는 공무원들의 월급이 박봉이던 시절인데 살림은 좀 어떠셨나요?

A 본가에서 지내다가 2만원을 타 가지고 5,000원짜리 사글셋방으로 살림을 냈지요. 그런데 분가하면서 남동생 하나와 사촌 동생 하나를 딸려 내보내신 겁니다. 그 때 막내아들이 2개월 때였는데 단칸방을 장롱으로 막아놓고 한 쪽은 우리 식구가, 다른 한 쪽은 동생들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막내가 소변을 잘 못 보더라구요. 동생들이라고 따듯한 아랫목 쪽을 쓰게 하고 추운 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어린 것이 얼마나 추웠으면 고추가 얼어서 소변을 못 보는 겁니다. 집사람이 얼마나 울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거기서 딱 넉달을 살았습니다.

Q 사모님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군요. 그럼 본가에서는 처음 주신 2만원 외에 지원이 전혀 없었던 겁니까?

A 그런 셈이지요. 게다가 청주로 대학을 다니는 동생에게는 차비라도 주어야 하니 어려움이 말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부모님께 도저히 못 살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고추 한 포대를 주시는데 그게 지금 생각하면 100근은 되나봐요. 오토바이에 겨우 싣고 시장에 내다 팔았더니 60만원을 내주지 뭡니까? 정말 큰돈이었지요.

Q 그럼 그 돈으론 뭘 하셨습니까?

A 집사람이 '이대로는 못 살겠다. 10원 한 푼이라도 벌어야겠다' 하고 여기저기 일을 찾았던 모양인데 마침 학교 앞에 조그만 구멍가게가 하나 나왔대요. 그 60만원으로 가게 계약을 해버렸습니다. 외상으로 물건은 받았는데 그래도 가게에 진열대는 있어야 하잖아요. 마르지도 않은 생 미류나무를 베어다가 제재소에 싣고가 켜다가는 뚝딱거리고 만들었어요. 과자부터 국수까지 식구가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해서 2년 후 시장통으로 가게를 옮겼는데 마침 음성에서 소년체전이 있어 경기가 좋았어요. 운이 좋았는지 장사가 잘 되어 집을 하나 사서 이사를 했는데 집사람이 그 때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관절이 좋지 않아 찬물에도 못 들어갑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지요.

Q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사모님도 고생이 많으셨는데, 혹시 다시 태어나신다면 지금의 사모님과 결혼하시겠습니까?

A 아, 당연히 해야지요. 초년에 너무 고생시킨 것이 미안해서요. 부모님 모시느라 옥살이를 시킨 것 같아 미안하고, 집에 돈을 못 가져다 줘서 미안하고, 죽는 날 까지 갚아가면서 살겁니다. 집사람은 구겨진 옷을 입으면 안된다고 지금까지도 속옷을 다려주는 사람입니다. 집사람에게는 1000점을 줘도 아깝지 않아요. 다시 태어나 만난다면 단 하루라도 집사람을 정말 최선을 다해 아껴주고 사랑할 겁니다. 꼭 그렇게 해주고 싶어요.

Q 정말 사모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시네요. 최 조합장께서 그만큼 밖에서 일을 많이 하셨으니 사모님께서도 다 이해해 주실 겁니다. 그런데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나요?
A 중학교 때부터 배구를 했었는데 그 때는 대한배구협회 충청북도 총감독이 한 번 되보고 싶었어요. 워낙 운동을 좋아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제 모습에 만족합니다. 가끔 '내가 우리 동생들 모른 척 하고 대학을 나왔으면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는데 제가 공부를 잘해서 그 때 대학을 나왔더라면 아마 교사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금은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Q 어쨌거나 후회하지 않으신다니 다행이네요.
A 여담이지만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저는 남 비위 못 맞추고, 불의를 못 보고, 정의는 내 머리가 두 쪽이 나도 행합니다.

Q 산림조합에 근무하시면서 아직까지 잊지 못할 추억 하나 가지고 계시지요?
A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뭔지 아십니까? 산에서 일하다가 라면에 말아먹는 찬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산림조합의 일이라는 것이 책상 앞에 앉아서만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제 봉고차에는 늘 라면이 실려 있었습니다. 인부들을 데리고 일하다가 때가 되면 라면을 끓여서 싸가지고 온 도시락의 찬밥을 말아 먹었지요. 눈이라도 쌓이는 날엔 그 눈을 남비에 꾹꾹 눌러 담아 불을 붙이고 물이 끓으면 라면을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소면을 먼저 삶아내고 면과 스프를 넣습니다. 그 라면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냥 식당에서 사먹곤 하지만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저희 직원들 차에도 라면이 늘 실려 있더라구요.

Q 지난 2007년 산림조합 육성 유공자로 선정돼 국무총리 표창을 받는 영예를 안으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공적이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A 사실 그 상은 제가 아니라 직원들이 받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 해에 산림토목 시공분야에서 사업 수주를 많이 해서 돈을 많이 벌었어요. 전국 100여개 시군 평가에서 한 번도 하기 힘든 것을 연거푸 2번이나 최우수 평가를 받았습니다. 직원들이 열심히 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Q 하지만 그만큼 직원들이 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 주는 것이 기관장의 임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아직 산림조합의 역할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분들도 계실텐데 일반 군민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산림조합이 하는 일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A 광범위하지만 쉽게는 산을 잘 가꿔서 주민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만들어 줄 수 있도록 산림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첫째 임무지요. 요즘 등산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지 않습니까? 사실 거기에 희생당하는 건 산입니다. 등산이 취미이기도 하지만 저는 산이란 산은 다 가보는데 남의 산을 봐야 우리 산을 만들 수 있는 겁니다. 현지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산주들의 애로사항을 파악하고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수시로 소통해야 합니다. 조합원이 있기에 조합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합원이 살 수 있는 조합을 만들어야지요. 그리고 음성군에는 부재산주가 많은 편입니다. 이들의 소외감을 빨리 씻어주고 조합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산주들이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고 음성군민으로서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조합의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Q 산림조합에 입사하신 뒤로 수십 년 간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셨는데 조합장을 하셨던 기간을 자평해 볼 때 아쉬웠던 부분이 있으시다면요?
A 처음 상임 이사라고 있을 때는 조합 운영만 잘 하면 됐는데 조합장에 당선되고 보니 제일 밑에서부터 살펴봐야 하는데 제가 통찰력이 부족해서 조합원들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점이 가장 후회됩니다. 다시 기회가 주어졌으니 사랑방좌담회 같은 형식의 모임을 통해 직접적인 의사전달의 통로를 마련하고 최선을 다해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를 다시 조합장으로 뽑아주신 것은 제대로 못 했으니 다시 한 번 해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처음의 조합장이나 말년의 조합장이나 초심을 잃지 않고 변함없이 열심히 일하는 조합장으로 남겠습니다.

Q 결과적으로는 무투표로 당선되셨지만 당선될 자신이 있으셨나요?
A 어차피 조합원들의 선택으로 당락이결정되지만 입후보하지 않은 선배와 친구에게 고맙게 생각합니다.

Q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어떤 분을 떠올리시나요?
A 감사하게도 저를 사랑해 주신 분이 많습니다. 방황하는 저를 걱정하셨던 권형용 읍장님, 함께 운동하던 정명수 선배님, 장일우 조합장님과 정인영 교육장님. 이분들은 저를 친자식 이상으로 생각해 주신 분들입니다. 그분들만큼만 하려고 합니다.

Q 마지막으로 음성군민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지요.
A 조금 어려운 상황이지만 군민들이 적극적으로 힘을 모아줘야만 군이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신바람 나는 음성군을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아 주십시오. 군민여러분, 항상 사랑합니다.

주량이 소주 석 잔이라고 이야기 하던 최상욱 조합장을 믿었건만 취중토크가 끝나갈 무렵 테이블 밑에는 세다가 지칠만큼의 빈 병이 쌓여 있었다. 좋은 날이니 두 병이라도 마시겠노라고 호언장담하더니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짧은 시간에 한 사람의 인생을 돌아보고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인줄은 알지만 최 조합장은 애처가를 자처할만큼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바위처럼 의지가 굳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군민들에게 양팔로 크게 하트를 그려 보이는 유쾌한 인물이었다. 오늘 당선증을 받은 그야 새로 진 짐이 무겁겠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어느때 보다도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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