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6월 항쟁의 연가’
끝나지 않는 ‘6월 항쟁의 연가’
  • 고병택
  • 승인 2013.10.18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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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정 음성군농민회 회장

▲ 음성군 농축산물 가격 안정 기금 조례 제정을 환영하고 있는 이상정 회장
▲ 음성군 농축산물 가격 안정 기금 조례 제정을 환영하고 있는 이상정 회장

1987년 1월 14일 새벽, 서울대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고문으로 사망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발표했지만 국민은 믿지 않았다.

학생과 재야 세력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국민의 분노는 폭발했고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해 6월 10일, 박종철 군에 대한 고문 살인을 규탄하고 민주 헌법을 보호하려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그렇게 6월 민주항쟁은 민주주의의 초석이 됐다.

암울했던 대학시절, 출세와 기득권을 위한 '스펙 쌓기'를 포기하고, 사회 국가 민족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뜻을 세운지 30여년, 이상정(50·사진) 음성군 농민회장의 '6월 항쟁의 연가'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조국의 농촌 현실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귀향

이상정 회장은 평생을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했던 이달영 前 금왕. 원남 우체국장 슬하에 5남매 중 넷째로 소이면 중동리에서 태어났다.

어렵던 시절,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님의 의지는 5남매를 모두 대학에 진학시킬 정도로 남달랐다. 이 회장은 소이초등학교 6학년 때 청주로 전학, 일찌감치 형제들과 자취생활을 하면서 학업에 매진한다.

1984년, 고려대학교 문과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생활 중 전북 고창 농촌활동을 하면서 농민들의 '농지 찾기 운동'을 통해 조국의 농촌 현실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져 든다.

결국, “어려운 농촌에서 농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일”이라는 결정을 내린 이 회장은 부모님의 반대를 무룹쓰고 졸업과 동시에 귀향, 치열한 삶의 도전을 시작한다.

녹록치 않은 농촌생활, 애써 일궈낸 양계장 1000평이 눈에 무너지는 아픔도 있었지만 한번도 그 시절의 결정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고 그는 술회한다.

이화여대를 졸업, 농촌에 대한 헌신과 농민운동을 꿈꾸던 아내 공현정(現 음성군 여성농민회장, 씨앗지역아동센터 대표) 씨는 가장 믿음직한 반려자로 혹은 동지로, 묵묵히 곁을 지켜줬다.

93년 결혼. 두 자녀를 두고 부모를 모시고 있는 부부는 현재 민들레 농장을 경영하면서 닭 13만수를 키우며 젊은 날의 소중한 꿈을 이어가고 있다.


진솔한 삶의 여정…상징적 인물로 '우뚝'

1990년 음성군농민회 초대 사무국장을 시작으로 현재 음성군농민회장, 소이면 갑산리 산업폐기물 반대 집행위원장, 음성민중연대 공동대표 및 집행위원장, 음성농협 감사, 음성군 먹을거리 순환체계 위원회 위원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이상정 회장.

그는 “농민, 농업, 농촌, 고향을 위해 어려운 일을 대변,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농민들의 요구가 받아들여 질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이 사회에서 가장 힘들게 일하지만, 대우받지 못하고 소외된 농민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소신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국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에 의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 받은 그의 대학시절 용기가 이제는 농촌을 위한 거름이 되어 주위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


갑산리 산업폐기물 반대 운동 승리

가장 보람됐던 일을 묻자, 이 회장은 음성의 환경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었던 소이면 갑산리 산업폐기물 반대 운동을 승리한 일을 꼽았다.

이 회장에 따르며 당시 업체는 전국의 산업폐기물(대형트럭 30만대 분량)을 싣고 와서 5분마다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10년 동안 소이면 갑산리에 파묻는 일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그는 음성군과 원주환경청을 수시로 드나들며 설득하기를 수십번, 폐기물업체의 협박 회유 금품살포 등을 이겨낸다. 특히 대한민국 최고의 로펌인 김&장을 상대로 행정소송 재판에서 승소하는 뚝심을 발휘했다.

또한, '농축산물 가격 폭락에 대비한 농축산물 가격 안정 기금 조례 제정운동'을 벌여, 6421명의 군민 서명을 받아 전국 최초로 주민발의 조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일도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이 조례와 기금은 현재 10억원의 자치단체 출연으로 안정적인 출발을 했으며, 급속히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아울러 최근에는 충북도에서 지원조례를 만들면서 음성기금에 내년에는 3억 원 정도의 충북도 지원이 가능한 상태로 발전했다.


“사람에 대한 사랑”…또 다른 6월 항쟁

그는 “농축산물 수입개방으로 갈수록 힘들어 지는 농민들이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이 가장 큰 희망”이라며 “현재 음성군과 함께 추진하고 있는 로컬푸드 운동이 성공해서 어려운 고령농 소농들에게 안정적인 소득보장이 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높은 자리, 거만한 완장을 마다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 농민들과 함께 하는 그의 진솔한 삶의 여정이 아름답게 여겨지는 대목이다.

때로는 강한 어조와 행동으로 농촌, 농민들을 대변하며 강성 이미지를 보여 주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는 그의 소박한 미소속에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농민인구가 전 인구의 8%정도 밖에 안 되고, 식량자급률은 22%로 추락한 상태에서 현재 정부에서 추진하는 한중FTA까지 타결된다면 농민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된다”며 “식량주권의 문제를 국민운동으로 확산시켜 농촌을 지켜나가려는 국민적 합의가 절실한 시점”이라는 그의 농민사랑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농업 농촌을 지키고자 모인 약 200여 명의 회원들을 주도하며, 한중FTA반대운동, 대기업 농업생산진출반대운동, 농협개혁운동, 맹동 금왕 태화광업 광산개발 반대운동 등 음성지역의 환경을 지키는 운동, 농민약국 활동 등을 펼쳐 나가는 이상정 회장,

그는 또 다른 '6월 항쟁'을 치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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