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진 음성읍체육회장
고국진 음성읍체육회장
  • 유재윤
  • 승인 2012.09.2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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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생기면 지역의 질서가 무너진다

매사 긍정적이고 모나지 않아서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책임감이 강해서 무슨 일이든 끝까지 책임지고 마무리 하는 사람.
선·후배간의 예의를 존중하고 친구간의 우정 또한 돈독하며 웃어른을 잘 모실줄 알기에 그래서 더욱 인정 받는 사람, 사람들은 고국진 음성읍 체육회장을 그렇게 말한다.
무슨 일이든 자기 맡은 일에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며 한 길을 걷고 있는 고국진 회장은 1963년 원남면 마송리에서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고 회장은 원남초와 음성중, 음성고를 거쳐 청주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어린시절, 그 당시 시골의 시대상이 너나할 것 없이 어려웠듯이, 그의 집안도 고추농사, 양잠 등을 하는 전형적인 시골 농삿꾼의 집으로 어렵기는 남들과 매 한가지였다.
70년대 초반, 다행히 정부에서 추진하는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시골에도 슬레이트 지붕개량사업이 시작되었고 그것을 발판으로 부친께서 음성읍에서 유리사업(영진유리공사)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것이 지금까지 고 회장의 직업이 되었다.
고 회장은 고등학교 동창들보다 1년 늦게 대학에 진학했다.
고교 졸업 후 1년 여간 가게 일에 전념하다가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을 보며 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열등감 극복차원에서(사실은 대학 진학의 꿈이 있었으나 가정 형편상 학업을 미루어 놓은 상태였다)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난은 학업을 늦추게 만들었으나, 그의 꿈마저 빼앗을 수는 없었다. 참으로 독한 마음으로 공부했다.
일하며 학교에 다녔다. 일과 학업을 병행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했다.
경제적 위기도 여러번 있었다. 고비도 많았다.
그럴수록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남들보다 두배 세배 이상으로.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받긴 했지만 어찌 보면 그는 자수성가한 사업가의 전형이다.
고 회장은 근면과 성실을 바탕으로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사업을 이끌어 왔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젠 사업도 안정적이 되었고 어느정도 궤도에도 올라왔다.
그는 여기서 만족 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면에서 약간의 숨통도 트이고 자리도 잡았지만 자신의 내면에 꿈틀거리는 사회봉사에 대한 욕망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이젠 자신도 음성군 발전을 위해서 무슨 일인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시작하게 되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평소 성격 때문에 그마져도 시작이 쉽진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런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어짜피 할거라면 죽기살기로 해보자며 세상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시작한 사회단체 활동이 JC회장을 비롯하여, 음성고 총동문회 감사, 음성군 육상경기연맹 감사, 키비탄 클럽, 음성군 체육회 이사 등을 맡아 일 해왔고, 일하고 있으며, 2012년부터 음성읍 체육회장직을 맡아 지역발전을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다.
음성 JC회장 시절엔 음성JC창립 30주년 행사로 설성공원에 음성군 유래비를 제막 했고 어려운 이웃을 위한 합동결혼식을 성공리에 추진 했는가 하면 각종 형태의 봉사활동으로 많은 칭송을 받는 등 각종 단체에서의 그의 활동상은 이루 다 열거할 수가 없다.
고 회장의 사전에 대충 대충이란 말은 없다.
고 회장은 음성읍 체육회장 취임사에서 “지역민과 같이 함께하는 음성읍 체육회로 이끌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지금의 음성읍 체육회는 그 어느 때보다 지역주민의 참여도가 높다.
음성읍 이장협의회는 물론 주민자치위원회, 지역 개발회 등 음성읍의 모든 단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체육회와 힘을 합쳐 지역 발전을 일구어 나가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역 주민 모두가 읍 행정에 동참, 질서와 화합의 바탕위에 매사에 소신을 가지고 함께하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생활한다면 못할 일도 없고, 지역발전을 앞당길 수 있으며 또한 음성읍 발전을 위한 구심점을 찾아 지역 주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그를 두고 항간에선 저사람 뭐 다른 생각이 있어서 저러는거 아닌가 하고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사람도 없지 않단다. 그러나 그는 단연코 노(NO)라고 손 사레 친다.
정치란 금전적 여유와 지식, 사회활동을 통한 주민과의 융화, 삼위일체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자신은 어느 것 하나 갖춰진 게 없기에 그저 사업이나 열심히 하고 가정 잘 꾸려서 가족들과 함께 욕심 없이 살아가는게 꿈이며 계획이란다.
98년, 서른일곱의 늦깍이 나이에 음성읍 평곡리에 사는 부인 엄혜란 씨와 중매 아닌 중매로 만나 자신 때문에 촉망받던 유명디자이너(서울에서 디자이너 생활)의 길을 마다하고 꿈을 져버린 아내에게 지금도 결혼 당시의 약속을 단 10%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고 회장의 이제 남은 작은 꿈은, 지역발전을 위한 봉사와 더불어 결혼당시 약속의 채워주지 못한 나머지 90%를 채워가며 노모와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오손 도손 살아가는 것이란다.
이제 그의 작지만 소박한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우리 모두 그에게 아낌없는 찬사의 박수를 보내보자.
“음성읍 주민 모두가 매사에 소신을 가지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지역 발전에 동참한다면 그 무엇이라도 일궈 낼 수 있다”며 “갈등이 생기면 지역의 질서가 무너지므로 다 같이 화합하여 하나 되는 음성읍을 만들어 가자”고 인터뷰를 마치는 고 회장의 마지막 말에 비장감마져 감도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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