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회 한나라당 중앙연수원 부원장
김수회 한나라당 중앙연수원 부원장
  • 이상훈 대표
  • 승인 2012.01.10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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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토크(열아홉번째 손님)


자리를 잡자마자 막걸리 한 사발을 청하는 김수회 한나라당 중앙연수원 부원장. 자기는 천생 촌놈인지라 막걸리로 목부터 축여야겠단다. 일단 그 화끈함이 마음에 들었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100여일 앞둔 시점인데다 예비후보자 등록까지 1등으로 마친 그이다 보니, 인터뷰 시간을 잡기도 쉽지 않았거니와 약속을 잡고도 적이 걱정이 되었건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노인복지와 청년일자리 창출이라는 묵직한 사회복지정책을 들고 나왔으니 만큼 선거에 임하는 각오 또한 남다를 터이지만 오늘은, 수년간 대중에게 노출된 걸러지고 정치색 있는 김수회가 아닌 인간 김수회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 볼 요량이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언제 시시콜콜한 그의 인생사를 들어볼 기회가 있겠는가? 일단 막걸리 한 사발씩을 들이켜고 김 원장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Q 예비후보자 등록 첫 날 사무실이 있는 건물 벽에 걸린 '어머니, 촌놈 김수회입니다'라는 글귀를 보고 옆에 있던 사진을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되던 기억이 납니다. 궁금하네요. 왜 하필 촌놈인지.
A 촌에서 자라 촌에서 컸으니 당연 촌놈이 맞죠. 저는 천성이 저만의 이익을 쫓아 몸을 운신하는 일은 못해요. 촌놈처럼 우직하게 변하지 않는 소신으로 앞만 보고 뚜벅뚜벅 걸어가겠다는 저의 신념을 담아 표현해 봤습니다. 덧붙여 맹목적인 사랑과 희생을 감내하며 가족 모두가 잘 되길 바라길 기원하셨던 우리네 어머니를 먼저 찾은 것입니다.

Q 그런 뜻이었군요.
A 사실 다른 후보들이야 서울에서 일류학교를 다니고 좋은 직장을 다녔다지만 저야 집안이 어려워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또 촌에서 살았으니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커리어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껏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저의 신념을 위해 한 길만을 걸어왔습니다. 유권자들도 저의 이런 뚝심을 알아주실 거라 믿습니다.

Q 사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문제가 바로 한나라당 공천인데요, 그만큼 경쟁도 치열한데 혹시라도 공천에서 탈락하신다면 당의 뜻에 승복 하실 건지.
A 멋지게 경선해서 이기면 당선을 위해 더 열심히 뛰면 되는 거고, 또 진다하더라도 아름답게 포기하고 자신의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죠. 경선에서 진 사람이 나중에 장관을 할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저야 이제껏 해 왔던 대로 한나라당을 위해 뛰면 되고.

Q 그렇죠.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사람 일은 모르니까요. 그나저나 처음부터 너무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 같은데 다른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해외 봉사를 많이 다니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A '많이'라고 표현을 하시니 부끄럽습니다만 성심껏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Q 요즘은 젊은이들의 해외봉사 활동도 경쟁이 치열하다고 하던데요. 본인 입장에서도 다양한 경험도 쌓을 수 있고 채용하는 기업 측에서도 그런 경험을 높이 산다고 합니다.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없겠지만 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소개를 해 주시죠.
A 아직도 아이들의 그 큰 눈망울이 기억납니다. 한 번은 캄보디아에 갔을 때의 일이예요. 비포장도로를 4시간이나 달려야 나오는 시골인데 마을까지는 차도 못 들어갈 만큼 도로가 비좁아요. 그 길 양 옆으로 원두막 같이 생긴 집이 늘어서 있고 그 앞에 아이들이 늘어서 있는데 정말 애가 애를 안고 있는 형편이었어요. 게다가 십 몇 년째 짓다 만 학교는 마무리공사를 못해 개교를 못하고 있었구요. 학교 공사를 마무리 짓고 칠판부터 아이들이 사용할 학용품까지 몇 차를 실어 날랐습니다. 대한민국 문구류가 좀 좋습니까. 난리가 났죠. 떠나는 날 그 마을 촌장님이 코코넛 열매를 주시면서 '드릴 것이 이것밖에 없다'고 하시더군요. 최상급 열매였는데 시장에 내다 팔면 2불씩 받는다더군요. 그들에겐 큰돈입니다. 그렇듯 큰 호의를 보여 주시는데 안 받을 수도 없고 해서 받아 왔습니다만 정말 감동적인 선물이었습니다. 그 때의 그 감동, 매달리던 아이들, 칠판이 위풍당당하게 걸린 교실…. 절대 잊을 수가 없죠.

Q 언제부터 그런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습니까?
A 지금이야 여기저기 보이지 않게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 땐 워낙 먹고 사는 일에 바쁘다 보니 주변을 돌아볼 기회가 없었어요. 그런데 한 번은 청계산에 회식을 하러 가게 됐어요. 직원들이 180명이었으니 마땅히 시내에 들어갈 만한 식당도 없었고. 지금이야 대기업 사장들의 저택이 들어서 있지만 그 때만 해도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산자락에 겨우 비닐하우스를 짓고 살림을 하거나 토종닭 같은 것을 키워 어렵게 장사를 하던 곳이었어요. 한 집을 찾아 갔는데 엄마는 수 년 전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간암으로 누워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 집 아들이 중학교에 가게 돼서 교복을 사 가지고 왔는데 엄청나게 큰 사이즈를 샀더군요. 집이 어려우니 앞으로 3년 동안 입을 수 있는 사이즈로 산겁니다. 어린 아이가 속이 깊었어요. 제가 너무 속이 상해서 앞으로 네가 3년 입을 것 내가 다 사줄 테니 맞는 걸로 바꿔 오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직원들에게 각출을 해서 얼마간을 보태주고 왔습니다. 그게 계기였어요. 그 뒤로 그 아이가 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줄곧 후원을 하게 됐죠.

Q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아이가 잘 자랐네요. 이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누리재단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죠.
A 나누리재단 이야기를 하자면 좋으면서도 조심스럽습니다. 노인복지 분야는 이 김수회가 살아있는 한 꼭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야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구요. 우리 중부 4군에 노인인구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일 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아요. 설사 평생 먹고 살 돈이 있다손 치더라도 삶 자체가 희생이었던 그분들은 자식들 때문에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을 다 참아요. 그나마 일까지 못 할 지경이 되면 정말 갈 곳이 없어요. 겨울철만이라도 그분들이 따뜻한 곳에서 잘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시작했던 사업인데 정치적인 오해가 생겨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정말 순수하게 우리 지역의 노인복지를 위해 초당적 차원에서 다 함께 참여해 만든 단체인데 그런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들에게 그런 오해를 사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말 하지만 정치적 목적 때문이 아니라 누가 해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Q 어릴 때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태어나신 곳이 청천인가요?
A 청천 화양계곡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깡촌이예요. 길도 없어서 계곡을 따라 걸어야 했구요. 중학교 1학년 때에야 전기가 들어 왔답니다. 요즘같은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당연히 눈이 내렸고 정말 추웠어요. 초등학교에 가려면 길도 없는 산길을 한 시간은 걸어야 했어요. 새벽 다섯 시 반이면 무조건 기상해서 볶은 콩을 한 접시 먹고 학교에 가야 했어요. 정말 추운 날엔 '학교가 가까웠으면 좋겠다, 학교에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드라마 속 영상 같아요.

Q 농사도 지어 보셨나요?
A 그럼요. 학교 끝나기가 무섭게 집에 와서 엄마 일손을 도와야 했어요. 여름이면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담배잎을 따고 고추밭과 콩밭에 풀을 메야 했답니다. 도대체 무슨 풀이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어요. 제가 잡초 때문에 농사에 질렸다는 거 아닙니까.

Q 그럼 중학교는.
A 중학교는 청천중학교를 다녔어요. 태권도를 했는데 그래도 제법 운동을 좀 해서 시합만 나가면 무조건 1등을 했어요. 태권도를 시작하게 된 것도 너무 어려워서였어요. 그 땐 체육특기생이 따로 있었는데 체육관에는 늘 먹을거리가 있었거든요. 그 당시에 김밥이나 오뎅 하면 남들은 생각도 못 하던 시절이에요. 남들이 볼 때는 할아버지가 김사달 박사니 대단한 집안이라 생각했지만 집에 드나드는 사람은 많아도 살림에는 전혀 도움이 안됐어요. 거꾸로 빚만 생겼을 뿐입니다.

Q 할아버님이나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A 정치적인 목적인지 본인들의 타고난 성품인지는 모르겠지만 돈만 있으면 남에게 베푸는 분들이셨어요. 저에게도 무조건 '남에게 베풀어라'는 말씀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하셨으니까요.

Q 그러셨군요. 그 성품을 원장님이 물려받으신 모양입니다. 고등학교는 증평공고를 가셨네요. 고교 생활은 어떠셨습니까?
A 증평공고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운 학교입니다. 그때만 해도 기술을 장려하던 때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수학여행이 생각나네요. 2학년 10월이었어요. 전교생이 다 여행을 가는데 그 때 수학여행비가 6천2백 원 이었거든요. 고추 한 근이 6천원일 때죠. 돈이 없으니 당연히 못 가죠. 그런데 저 혼자 같았으면 안 가고 말았을 텐데 친구 한 두 명이 또 못 간다고 서운해 했어요. 그래서 3학년 선배들에게 가서 좀 도와달라고 했죠. 선배들이 도와줘서 모두 다 함께 수학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Q 지금도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때 고등학교는 어쩌다 그만두셨나요?
A 그 때 이미 아버님이 많이 편찮으셨어요.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하셔서 실패하시고 몸도 안 좋아지는 바람에 집안 형편도 너무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제게는 너무도 멋쟁이 아버님이셨거든요. 제 기억엔 늘 말끔한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계셨으니까요. 고등학교 1학년 때 대전 국립병원으로 옮기게 되셨어요. 일반 병원에 비해 병원비가 쌌거든요. 고등학교 2학년 말이 됐을 땐 아버님은 대전 병원에 계시지, 어머니는 매일 울면서 농사지으시지, 도저히 생활이 안 되겠더군요.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가 사출부터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하루하루 살아남는 게 중요했죠.

Q 그러고 보면 자수성가하신 거로군요. 그 때 이야기를 좀 더 해 주시죠.
A 그 땐 뭐 노숙을 하다시피 일을 했으니까요. 어쩌다 화장실을 가려면 번듯한 식당엔 가지도 못하고 허름한 식당을 찾아가 부탁을 해요. 그러면 그 화장실에 앉아 생각했죠. '아! 이런 냄새나는 좁은 공간일망정 이것만이라도 내 공간일 수 있다면 세상에 못 할 것이 없겠다'구요. 무조건 돈을 벌어야 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일찍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Q 어린 나이에 사업이 쉽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A 처음 시작한 사업이 학교 등지에 갈탄을 납품하는 일이었어요. 통상 학교는 7, 8월에 갈탄을 납품해야 하거든요. 늦어도 10월까지는 납품을 끝내야 하는데 아 글쎄 날짜가 다 돼가도 물건이 안 오는 겁니다. 그 때만 해도 다 수입품이었거든요. 한 마디로 사기를 당한 거죠. 그 때 처음으로 그렇게 큰 빚을 졌어요. 그 빚을 갚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또 망해서 더 큰 빚을 갚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죠.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Q 사업적으로는 성공하셨다고 들었는데요.
A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 사업을 하면서 개인적인 영리 보다는 충북 괴산군 청천의 아주 골짜기에서 태어났지만 나름대로 중앙에서 '김수회' 하면 다 알고, 자수성가했다고 평가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파워 있고 배짱 있다는 소리도 듣기 좋구요. 우리 지역 젊은이들이 저를 보면서 누구든지 김수회 보다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Q 그럼 이쯤에서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실만한 것을 또 여쭤보지 않을 수 없네요. 노인복지를 최우선으로 내세우셨는데요.
A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바로 '복지'입니다. 특히 우리 어머니들은 이제 '받을 권리'가 있으십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있는 것입니다.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젊은이의 미래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기업이나 정부, 우리 사회 모두가 나서서 우리 어르신들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수년째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Q 어쨌거나 한나라당 예비후보자로 등록하셨고 공천이 1차 관문인데 스스로 어떤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물론 경선도 할 수 있지만 저는 우리 한나라당 사람하고 싸우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습니다. 타 정당 의원과의 싸움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많은 시간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동안 덕 쌓고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한나라당이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유권자들로부터 불신임을 받아 지난 선거에서 표가 야당으로 갔지만 그런 식의 개인적인 분노 표출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국민 자신에게 돌아오고 맙니다.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죠. 저의 조부들께서는 늘 정치만 하셨습니다. 어릴 땐 잘 몰랐지만 어려서부터 제가 집안에서 배운 건 늘 남을 돕고 배려하는 삶입니다. 조부님은 늘 제게 말씀하셨어요. '사람을 다스리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원칙'이라구요. 저는 그런 정치인이 되고 싶습니다.

Q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신다면.
A 저는 국회의원들에게 늘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아침에 시장에 가 보라구요. 대한민국 국민이 얼마나 피터지게 열심히 사는지 그들이 두 눈으로 봤으면 합니다. 자기네는 다 갖고 있으니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죠. 국민과 함께 움직여 주는 사람이 국회의원입니다. 그 마음을 읽고 같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어야 대한민국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제가 국회에 들어가 단 1개월이라도 활동할 수 있다면 저는 기존 정치인들의 생각을 무조건 바꾸고 싶습니다. 국민이 가는데 왜 국회의원이 못 따라갑니까? 선거 때만 뭐뭐 하겠다는 식의 이야기 하면서 그들과 함께 데모 한 번 같이 해 본 적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우리 국민들은 너무 훌륭합니다.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국민들이 똘똘 뭉쳐 나라를 살려 왔습니다. 정치인들이 국민들과 함께 해왔으면 대한민국은 진작에 선진국이 되었을 겁니다.

Q 프로필을 보니 지식 경영인 대상을 받으셨던데요.
A 아, 그건 정치와는 전혀 상관없는 상입니다. 기업의 회계감사를 평가해 주는 상입니다. 회계감사에서 A+를 다섯 개나 받았다고 하더군요.

Q 다른 후보들과 차별화 할 수 있는 김 원장님만의 장점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A 저의 장점이라면 누구보다 내 지역을 잘 안다는 거죠. 증평, 진천, 괴산, 음성 4개 지역의 밑바닥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제가 바로 산 증인이니까요. 지역의 돌아가는 사정을 제일 잘 알겠죠. 필요한 것두요.

Q 이제 선거일이 100여 일 남았는데요. 중부 4군의 군민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A 우리 지역의 역사는 깁니다. 선거도 무수히 치러 왔구요. 여다 야다 내 감정의 분노다, 시대의 흐름에 대한 분노다, 모두 떠나서 누가 내 지역 사정을 제일 잘 알고, 맡길 수 있고, 함께 갈 수 있느냐를 신중하게 생각해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국회의원이 대단한 자리는 아닙니다. 내 지역에서 올라오는 민원을 잘 해결하고, 진정 우리 지역에 필요한 사업들을 함께 상의해서 만들 수 있는 국회의원이 필요한 겁니다. 너무 크게만 보지 마시고 조그만 내 지역에서 조그만 일부터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입법?발의할 수 있는 일 할 수 있는 인물을 뽑아 주셔야 할 때입니다.

크리스마스이브. 함께 하지 못하는 미안함에 아이들에게 직접 저녁식사를 만들어 주고 왔다는 다정다감함이 그동안 김수회라는 인물에게 가졌던 인상과 많이 달라 조금 놀랐지만 그 역시 한 가정의 행복을 꿈꾸는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가끔씩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갓 지은 하얀 쌀밥에 잘 익은 김치 한 조각 척 올려먹고 싶다는 천상 촌놈을 고집하는 김 원장. 국회의원 뱃지를 달아도 자신은 그저 묵묵히 일하는 촌놈일 뿐이라는 부연이 다시금 그의 얼굴을 보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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