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유 음성군의회 의원
남궁유 음성군의회 의원
  • 이상훈 대표
  • 승인 2010.07.02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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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Talk! 열두번째 손님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취중토크는 이런 나의 목마름을 채워주기에 정말 제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생겼을 때, 좀 더 깊이 알고 싶은 사람이 생겼을 때, 혹은 몸살이 날만큼 궁금한 사람이 생겼을 때. 대중의 궁금증을 핑계로 개인적인 욕구를 해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궁금증이 비단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기에 언제나 초대손님은 대중의 관심사 안에 있기 마련이다.
오늘은 음성군의회 제6대 군의원으로 당당히 의회에 입성한 남궁유 의원을 초대했다. 재선 의원으로, 새로 구성되는 군의회의 최 연장자로, 자신의 소신을 고집스럽게 지켜가는 평소 그가 보여주었던 성격으로, 앞으로 군의회를 어떻게 이끌어갈 지 기대해 보며 이야기의 첫 단추를 풀었다.

Q 우선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사실 선거직을 한 번 하기도 힘든데 재선까지 성공하신 걸 보면 지역주민의 뜻이 의원님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거운동 하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어떤 점이었나요?
A 군의원 선거는 지역의 살림꾼을 뽑는 일인데, 한나라당이니 민주당이니 해 가며 서로 편을 가르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렸고, 이래서 정치가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지역에서 지역주민의 화합과 발전을 저해하는 정당공천제는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그러면 언제쯤 '아, 내가 당선되겠구나' 하는 감이 오셨나요?
A 예비후보 등록을 마치고 나서 '지금과 같은 분위기라면 내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선거를 몇 번 치러봤기 때문에 유권자들과 인사를 하다보면 감이 오거든요. 손을 잡고 눈을 마주쳤을 때의 느낌으로 상대의 진심을 알 수가 있어요. 그 때 많은 분들이 나를 도와주고 계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60년 이상을 지역주민들이 제가 살아온 모습을 보아 오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를 해 주시는 거죠.

Q 어릴 때 이야기를 좀 해 주시지요.
A 아버님은 강원도 분이셨는데 일제 때 서울로 올라가셔서 자수성가하신 분입니다. 돈암동에 커다란 기와집을 한 채 가지고 계셨는데 저는 그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외가가 있는 음성으로 피난을 오셨습니다. 이후 음성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돈암동의 집을 팔아 마련한 그 큰돈을 남에게 빌려주셨다가 고스란히 날리셨답니다. 아버님은 마음이 너무 여린 분이셔서 남에게 싫은 소리 안하시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셨어요. 내 것도 그냥 주고 말면 그뿐인거죠. 그나마 남은 땅이 좀 있어서 그 어려웠던 시절에도 배를 곯지는 않았어요. 집에 방도 몇 개 있어서 묵어가는 손님도 많았고, 제 친구들도 놀러와 자곤 했답니다.
할머니는 인정이 많은 분이셨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집에 묵어가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국수나 누룽지를 끓여주셨습니다. 가마솥에 국수 삶을 물을 끓이고 있다가 누가 삐걱 하고 대문 열고 들어오면 물 한바가지 더 부으셔요. 친구들은 제가 없어도 제 방에서 자고 가곤 했답니다.

Q 사람의 성품은 타고 나는가 봅니다. 그렇게 인자하신 분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셨으니 어떻게 악한 사람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학창시절은 어떠셨나요?
A 사실 저는 그다지 잘난 사람이 아닙니다. 중학교 다닐 때 까지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어요. 공부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그런데 고등학교에 갈 때 쯤 되니 아버님께서 서울로 유학을 권하셨어요. 제가 6형제 중 장남이거든요. 그래서 서울 배명고에 입학을 하게 됐는데, 그 때는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컸어요. 게다가 당숙집에서 기거했는데 제가 먹을 건 시골에서 가지고 온다 해도 좁은 집에서 대가족이 살려니 불편함이 많았지요. 한밤중에 다른 식구들 깨울까봐 화장실 가는 것도 쉽지 않았거든요. 도시락 반찬은 늘 고추장이었는데 그 또래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얌전히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잖아요. 친구들과 장난치며 학교에 뛰어가서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꺼내보면 그 안의 밥이 고추장에 다 비벼져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Q 한참 예민한 시기에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하는 것이 쉽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A 당숙께서 아무리 신경 써 주신다 하더라도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생활하려니 힘이 들었어요. 게다가 학교에 가면 키도 작고 얼굴도 새까매서 아이들이 깜둥이라고 놀려대는 통에 싸움이 나기 일쑤였어요. 저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당시 선생님은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는지에 관해서는 묻질 않으셨어요. 결과적으로 친구를 때린 저만 늘 혼이 나는 거죠. 그러니 이래저래 서울 생활에 정을 못 붙이고 있었어요.

Q 그럼 언제 다시 음성으로 내려오신 겁니까?
A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돼서 집엘 내려왔어요. 그 때 친구들을 만났는데 서울에서 자취를 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어요. 주소를 받아 두었다가 나중에 친구들을 찾아가 보니 학교에 가기 싫어서 입학만 하고는 학교에 안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드문드문 학교를 결석하기 시작하다가 12월쯤에는 아예 학교를 안갔어요.
결국 어머님이 들이닥치셨어요. 어머니는 장남이 잘 해야 동생들이 본을 받을텐데 이럴거면 차라리 시골로 내려가자고 하시더군요. 저도 어린 마음에 나도 더 이상 학교 못다니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겠죠. 결국 그길로 어머니 손에 이끌려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Q 그래도 장남인데 부모님께서는 학업을 계속하길 원치 않으셨나요?
A 왜 아니겠습니까? 아버님이 서울에서 학교 다니기 힘들면 그냥 음성고등학교를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고 알아보니 음성고에 다니려면 1학년부터 다시 다녀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후배들하고 함께 다닐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더라구요. 그때부터 방랑의 길로 들어선 겁니다.

Q 그 당시도 그랬지만 지금도 역시 여건이 된다면 청주나 충주 등의 대도시로 고교진학을 시키지 않습니까? 물론 잘 된 아이들도 많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A 예. 저는 직접 경험을 해 봤으니까요. 그래서 두 아들을 청주로 보내면서도 집에서 통학을 시켰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여건도 어려웠지만 학창시절 저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 볼 때 그 편이 아이들을 위해서도 나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힘이 들었을 텐데 그래도 공부를 잘 해 주었어요. 이번 선거에서도 공약했지만 금왕·생극·감곡 지역에 인문계 고등학교 설립이 절실합니다.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이 진학을 위해 부모와 떨어지는 일은 없어야죠. 그리고 지역의 우수한 인재들이 고향에서 공부하고, 고향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합니다.

Q 옳은 말씀입니다. 대다수 농촌지역이 겪는 뼈아픈 현실이지요. 그래도 자녀들이 아버지의 뜻을 잘 따랐던 모양입니다.
A 2남 1녀를 두었는데 저는 아이들에게 공부 잘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어요.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주길 바랬지요. 몸이 병들면 수술하고 약을 써서 고치면 되지만 정신은 한 번 병들면 고치기 어려운 법입니다. 다행히 아이들이 바르게 잘 자라 주었어요. 아이들 3남매가 모두 대학을 졸업했지만 저희 집에는 그 흔한 전공서적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사는 모습을 봐와서인지 애들이 책 사겠다는 소리도 안하고 늘 도서관에서 공부했답니다.
한번은 아들 녀석이 써 놓은 자기소개서를 봤는데 그 첫머리에 '성실하게 살아가시는 우리 아버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옳지 않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 아버지처럼 살겠다'라고 쓴 거예요. 그걸 읽고 얼마나 가슴이 뭉클하던지.

Q 부모가 자식에게 존경받고 인정받는다면 그야말로 성공한 인생 아니겠습니까?
A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가끔씩 오히려 아이들에게서 배울 때가 많아요. 막내가 어려서 초등학교에 다닐 땐데 같은 반 친구가 충주로 전학을 가게 됐던 모양이에요. 그러니 한 반 친구들이 모여서 선물이라도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이야기 하던 중에 반장이던 아들이 나는 반장 안해도 되니까 전학 갈 친구에게 반장자리를 주자고 했답니다. 그래야 그 친구가 도시에 전학가서도 주눅들지 않고 기가 살거라구요.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린 아이지만 그 생각이 너무 갸륵하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한 번 남을 배려하고 베푸는 삶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기억이 나네요.

Q 좀전에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평소 부모님의 성품을 보고 배운 거겠죠. 그만큼 부모님을 인정한다는 이야기도 되구요. 자녀들뿐만 아니라 지난 선거 때 보니 며느리와 형제들도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시던데 큰 형님으로서의 역할도 잘 하셨나 봅니다.
A 아버님이 환갑을 맞으시며 저를 부르시더니 너에게 살림을 모두 넘길 터이니 동생들 고등학교 졸업시키고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보살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지금 이 순간부터 너에게 동생들을 다 맡기고 나 역시 지금부터 술과 담배를 다 끊겠다. 내가 길러야 할 아이들을 너에게 맡겼는데 내가 담배까지 얻어 필 수는 없다며 앞으로 나는 네가 먹는 만큼만 먹고, 입는 만큼만 입고, 너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아버님을 보고 저나 동생들이 더 열심히 산 것 같아요.

Q 그럼 서울에서 학교를 그만두고 내려오셔서 줄곧 음성에서만 생활하신 겁니까?
A 아닙니다. 그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내려왔다가 얼마안가 다시 집을 떠났어요. 방황을 많이 했지요. 아버님이 수술을 받게 되어 집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어느 날 선배가 갑자기 택시에 태워서는 바로 충주역전으로 데리고 가더라구요. 그 길로 군대를 간거예요. 제가 너무 철이 없으니까 아버님이 선배를 시켜 지원입대를 시켜버리신겁니다. 그렇게 군대를 가서 월남전까지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월남파병이 제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 때 정말 제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군대에 가서야 철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Q 월남에는 얼마나 계셨던 건가요?
A 사이공에서 13개월 있었습니다. 제대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 무극에서 월남에 다녀온 사람이 저 하나밖에 없어서 밖에 나가면 자신들은 막걸리를 마시면서도 제게는 맥주를 사주셨어요. 그러던 찰나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정석 의원이 저를 서울로 부르셔서 다시 서울생활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Q 그럼 사모님은 언제 만나신건가요?
A 식구 이모부가 저의 아버님과 친구사이신데 그분이 저를 눈여겨보시고는 중매를 하셨어요. 선을 보러 나갔는데 첫눈에 반하고 말았답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였는데 6개월쯤 사귀다가 결혼했어요. 그리고 서울에서 좀 더 살다가 금왕으로 내려왔습니다.

Q 어렸을 때 꿈은 무엇이었나요?
A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나마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줄곧 가지고 있었습니다.

Q
그럼 지금은 그 꿈을 이루셨네요. 음성군의회 제3대 의원을 역임하셨는데 그 때 이야기 좀 해 주시지요.
A 그 땐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중 기억나는 것이 체육공원인데 그 때 금왕체육공원이 없어질뻔 했었어요. 일개 군에 공설운동장이 2개일 수 없다고 해서 결국 수차례의 회의 끝에 명칭을 체육공원으로 변경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가지, 음성군 보건소를 지을 때의 이야긴데요. 저의 지역구라서가 아니라 음성군민을 위한 보건소라면 당연히 음성군의 중간지점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금왕읍에도 음성보건소와 같은 규모의 보건지소를 지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예산까지 세워 놨는데 그 뒤로 사업이 취소되어 예산을 반납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당시는 선거 때라 민감한 사안이기도 했고 마음으로만 안타까워했지요.

Q 어쨌든 절치부심 재선에 성공하셨고, 9명의 의원 중 가장 연장자이시기도 한데 의회에서의 역할이 크실 줄 압니다. 앞으로 어떻게 활동하실건지.
A 저는 인정받는 군의원이 되고 싶습니다. 군민들에게는 물론 제 자신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의원이 되고 싶습니다. 당리당략만을 추구하거나 지역주의를 떠나 진정 음성군의회가 진정으로 음성군의 발전과 음성군민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본연의 임무를 다할 수 있도록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행정을 감시, 감독, 견제하는 역할도 중요하지만 잘못된 점이 있다면 이에 대한 명쾌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의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명분만 거창하고 이루기 힘든 사업보다는 현실적이고 군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민생문제 해결에 주력하고 싶습니다. 당장 내 아이들 다니는 골목길 어둡지 않게 가로등 더 달고, 당장 불편한 하수도 문제 해결하고, 춥고 배고픈 이웃이 배곯지 않고 다리 뻗고 잠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군의원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Q 본인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저의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제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바로 표현하는 성격입니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거든요.

Q 평소 존경하는 인물이 있으신지?
A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 대해서는 피부로 느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적인 인물들에 대해서는 솔직히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을 표하기 어렵습니다만 故 박정희 대통령은 존경하고, 또 좋아하는 편입니다. 소신이 분명하고, 당장은 주변의 호응을 얻지 못하더라도 역사의 평가를 믿는 뚝심, 그리고 사나이다운 기백을 좋아합니다.

Q 원래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좋아하는 법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도 의원님과 공통분모가 많아 보입니다. 이제 음성군의회 제6대 의원으로서의 임기가 시작됐는데 음성군의 군의원으로서 음성군민들에게 한말씀 해 주시지요.
A 우선은 저 남궁유를 당선시켜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의원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 저를 지지하고 선택해 주신 군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들 이야기 한다. 다문 입은 고집스러워 보이지만 사람좋은 웃음을 웃을 줄 아는 남궁유 의원이다. 동석한 젊은 기자들을 위해 차곡차곡 인간관계를 쌓아가는 평범한 진리와 자신의 것 이상을 탐내지 말라는 기본적인 가르침을 진심으로 충고해 주는 남궁 의원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늘 당당하고 단정하신 조부님을 뵙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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