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동 전 충북도의회 의장
이기동 전 충북도의회 의장
  • 음성자치신문
  • 승인 2021.11.05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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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동'이 음성의 깃발을 들었다

20대에 대학 총학생회장으로서 리더십을 연마하고 30대엔 내로라하는 공기업(현 자산관리공사)의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때 기관 운영의 방법을 체득했다. 40대 땐 충북도의회 의원과 의장으로서 예산 편성 등 광역 행정을 터득했다. 최연소 광역의회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도의원선거에 첫 도전할 때는 일등 도의원이 되겠다더니 재선 땐 특등 도의원이 되겠다고 공약했다. 이런 그의 공약은 그대로 지켜졌다. 이젠 대한민국 음성군을 가장 부자 군으로 만들겠다고 그가 나섰다. LH 직원들의 내부정보를 활용한 부정한 땅 투기와 대장동 사태. 그도 역시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60 평생 그에겐 땅 한 평이 없다. 추진력과 결단력에다 청렴까지 갖춘 이기동 전 도의장의 도전의 역사를 담는다. <편집자주>

 

'이기동'이 음성의 깃발을 들었다

Q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A 할아버지께 저는 맏손자나 다름없는 존재였습니다. 어머니는 첫 딸을 낳고 제가 태어날 때까지 3년 간 고된 시집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다 그랬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어머니가 내가 고추 달린 널 낳고 시집살이를 면했다고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평곡초를 졸업하고 한일중학교에 갔는데 그 때는 시험 성적순으로 자리를 배치했거든요. 제가 늘 앞자리에 않으니 할아버지께서 저를 기특하게 생각해 담배조리를 판 돈으로 손목시계를 사 주셨어요. 그 때는 60명 중 3명만 시계를 차고 다닐 정도로 귀한 것이어서 자랑하느라 소매를 걷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닭이 낳은 달걀은 할아버지가 직접 관리를 하셨는데 유일하게 제 도시락에만 넣어주셨어요. 동생들이 지금도 가끔 할아버지가 저만 편애하셨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Q 대학 졸업 후 근무하셨던 성업공사(자산관리공사)는 소위 신이 내린 직장이라고 불리는 직장 아니겠습니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듯한데요.

A 정치를 하겠다고 11년이나 몸담았던 성업공사를 떠나 2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올 때에는 저 역시도 큰 모험이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 6학년이던 아이들과 집사람 모두 함께 낙향했습니다. 정치를 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다면 단신 부임으로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처음 낙향했을 때에는 가족들과 함께 왔음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정치를 하기 위해 잠시 내려온 것처럼 이야기하더군요. 선거만 끝나면 갈 사람이라구요. 아이들이 자라서 음성중학교에 입학하니 그제야 음성에서 살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Q 사모님과는 연애결혼 하신건가요?

A 저는 촌놈이고 집사람은 서울깍쟁이지요. 처음 만난 건 지난 1981년 조국순례대행진에 참가하면서입니다. 당시 집결지가 청주공설운동장이었는데 집사람과 한 조였던 남학생들의 텐트가 부실해 우여곡절 끝에 저희 팀과 한 조가 되었습니다. 조국순례대행진이 85일부터 15일까진데 둘째 날부터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98일 입대를 했으니 얼마 만나지도 못했지요. 군대 가서 편지 열심히 했는데 일·이등병 땐 답장도 잘 오고 휴가 나와서는 경복궁도 한 번 거닐어 보구요.

그런데 상병 때가 되니 답장도 잘 안 오길래 고무신 거꾸로 신었나 보다 했지요. 막 제대했을 무렵 크리스마스 직후에 종로에서 친구들과 모였는데 친구들이 집사람에게 연락해 보라고 하길래 전화했더니 불광동에서 종로까지 나와주더군요. 2차로 이태원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갔는데 12시가 되니 집에 가야 한다면서 맥주까지 한 박스를 사놓고 가는데 느낌이 참 괜찮더라구요. 밖에 나오니 캐롤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좌판에 토끼인형을 팔고 있길래 비자금을 털어 2000원을 주고 토끼인형을 사 선물했습니다. 집사람은 지금도 그 토끼인형을 가보처럼 간직하고 있습니다.

집사람 배웅하고 나이트클럽 안으로 들어가니 친구들이 난리가 났지요. 그렇게 체면을 세워주고 갔으니 덕분에 제가 영웅이 된거나 다름없었지요. 어차피 나는 정치를 할 사람이고 정치인의 아내가 되려면 배짱도 있어야 하는데 저한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더군요.

Q 그럼 고향에 내려오자마자 군수 출마를 하신건가요?

A 1998년이니까 우리 나이로 39세 때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경험삼아 한 번 나오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들도 하셨습니다만 제 입장에서는 정말 군수가 되려고 출마한 건데 세상물정을 너무 몰랐지요.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무모한 도전의 날들이 제게는 큰 정치적 자산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Q 민선 4기 때 2주년을 맞아 실시된 충청권 광역단체 평가 설문조사에서 이 의원께서는 성실성에서 1위를, 전문성에서 2위를 차지하셨는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저도 그 논문을 다 읽어봤습니다. 배재대 자치행정연구소가 주최하는 기획세미나에서 최호택 교수가 발표한 내용인데 그 연구가 의미 있는 이유는 설문에 참여한 응답자들이 각 시·도에서 일하는 590명의 공무원이였다는 겁니다. 가장 지근거리에서 살피고 있는 공무원들의 평가를 통하여 현실을 점검하고 남은 기간 동안 발전방안을 모색해 보기 위한 연구였죠. 성실성, 전문성, 참신성, 당리당략성 네 가지 항목을 평가한 것인데 재선이어서인지 참신성은 떨어졌나 봅니다. 성실성에 후한 점수를 준 이유는 임기 중 100%의 의회 출석률과 철저한 자료조사로 해당 기관에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내용이나 개선이 요구되는 사항을 지적한 점을 높이 사준 것 같습니다.

 

Q 어찌되었거나 내년에 군수 출마선언을 하신 거나 다름없는데 공천신청을 하실 거죠?

A 지난 10년 간 애당심을 갖고 당을 위해 기여하였습니다. 공천을 내리 세 번이나 받지 못했습니다. 내년 선거에서 당심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난관은 있겠지만 극복해 나아가겠습니다.

 

Q 군수가 되신다면 꼭 해보고 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A 음성군은 전통적인 농업군에서 농업과 공업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도시로 변모했습니다. 현재 음성에 2600여개 중소기업이 입주해 있는 것은 수도권과 인접한 우리 지역이 지역적 우위를 선점한 셈입니다. 하지만 물류회사의 경우 고용창출이 제한적입니다. 평택은 삼성전자 하나가 60만 명을 먹여 살릴 정도인데 우리군에는 500명이 넘는 기업체는 한 개도 없습니다. 호박이 굴러야지 콩이 열 번 구르면 뭐합니까? 군수가 되면 초우량기업을 유치하겠습니다.

더불어 청결고추와 인삼, 수박, , 복숭아, 화훼 등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대표적 농산물이 있습니다. 이들을 광역브랜드화 하고 철저한 품질관리를 통해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생산과 유통구조를 갖추어야 합니다.

 

Q 군수의 자격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A 군수나 여타 단체·기관의 장이거나 정직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임질 수 있는 말과 행동이 따라주어야지요. 또한 미래에 대한 통찰력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고, 정치현장에서는 확고한 소신과 배짱이 있어야 합니다. 유권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어야만 임기 동안 이들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더불어 균형 있고 투명한 행정은 차기 단체장의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Q 본인 자랑좀 해주세요?

A 저는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가 자신있게 말씀드릴수 있는건 옛날 자산관리공사 노조위원장과 충청북도의회 의장으로 활동할때 부동산에 관련하여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었던 기회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60평생을 살아오면서 현재 살고있는 음성읍 한성아파트를 구입한거 외엔 단 한평도 부동산을 산적이 없습니다.

지금 LH사건이다 대장동 사태이다 말들이 많지만 이 부동산과 청렴 만큼은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Q 당시 충북도의원으로 많은 일을 해오셨지만 '이것만큼은 정말 잘 한 일이다' 하고 생각하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A 정말 많은 일이 있지만 그 중에 지금도 자부하는 것이 교육환경에 관한 한 관계자들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드렸다는 겁니다.

관내 모든 학교에 다목적회관을 지을 수 있도록 지원하였고 관내 12개 법인 어린이집의 증·개축비를 지원했습니다. 또한 지방하천 정비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겠지요. 여담입니다만 이기동을 통하면 체육관을 지을 수 있다더라는 이야기까지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사실 이런 일들은 군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도의원이기 때문에 사업비를 끌어올 수 있었던 거지요. 이런 일들을 하면서 제가 도의원이라는 사실에 행복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Q 말씀 듣고 보니 그러네요. 일례로 고속도로와 국도, 지방도, 농도, 사도 등 투자주체와 관리주체가 제각각이니까요.

A 사실 아직 많은 분들이 이 구분을 잘 못하십니다. 동네 이장이 해야 하는 일, 군의원이 해야 하는 일, 도의원이 해야 하는 일, 군수가 해야 할 일이 다 따로 있는데 무턱대고 아무한테나 이야기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Q 남매를 두셨는데 아버지로선 몇 점이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A 처음 음성으로 낙향할 때는 0, 중학교 입학할 때는 49~50, 대학에 진학하고 제대할 때쯤 되니 딸아이가 아빠를 인생의 롤모델로 삼았다니 80점은 되는 것 같고, 아들과는 스킨십과 대화를 많이 하려 노력하긴 하지만 아직 60점 정도 되는것 같네요.

 

Q 인생의 동반자 사모님에게는 남편으로서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까요?

A 식구에게는 49, 제게 있어 와이프는 99점입니다. 불만 없이 따라와 주는 집사람에게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부부라는 관계 외에도 정치적 동반자로 생각합니다. 제가 49점인 이유는 보통 남편들이 해 주는 것을 못해주기 때문이구요.

 

Q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신다면?

A 백범 김구 선생입니다. 사실 3, 4번 읽은 책은 많지 않지만 백범일지는 5번이나 읽었습니다.

 

Q 음성군민에게 한 말씀 해 주시지요?

A 2년여 동안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얼마나 고생 많으셨습니까? 특히 문 닫는 가게를 보면서 소상공인들의 고충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만하면 가슴이 아립니다. 힘내십시오. 저 이기동, 그동안 풍부한 정치경험과 경륜은 바로 군민들로부터 얻은 소중한 자산이고 군민들이 베풀어 주신 과중한 사랑을 이제는 군민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군민의 힘을 하나로 모아 희망의 음성을 만들어 음성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된 취중토크는 어느덧 자리를 옮겨 이어지고 있었다.

배짱 두둑하고 화끈한 성격임에도 순간순간 보여주는 천진한 미소와 너무도 솔직한 그의 표현력에 모처럼 자리를 함께 한 기자들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끊임없이 풀어내는 이기동 전 의장의 이야기보따리에 취중토크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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