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일 중 무극로타리클럽 회장
김 일 중 무극로타리클럽 회장
  • 음성자치신문
  • 승인 2020.06.17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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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농에서 태어나 ‘사업성공의 꿈’ 이룬 ‘로타리안’
김일중 회장이 무극로타리클럽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일중 회장이 무극로타리클럽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남다른 안목으로 국내 최초의 ‘사설 추모공원’ 건립
가난한 시절 잊지 않고 어려운 이웃 위해 ‘봉사활동’ 

김일중(57) 무극로타리클럽 회장은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별로 즐겨하지 않는 겸손한 성품을 지녔으면서도, 맡은 일은 철두철미하게 감당하는 책임감 있는 인물이다.  
음성군 생극면의 빈농 가정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나 생극초등학교와 생극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가난한 현실에서 벗어나 사업가로서 성공하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대경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을 앞둔 그는 당시 인기 있던 직장인 은행 입사를 추천받았지만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삼성전자에 입사해 10여 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고향에 사설 추모공원 건립
사업가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던 김 회장은 어느 날 우연히 천안 인근에 있는 공원묘지를 지나게 됐다. 무심코 많은 사람들이 묻혀 있는 묘지를 바라보던 그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뭔가 번쩍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땅이 많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마냥 묘지가 늘어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다보면 다가올 미래에는 틀림없이 장례문화가 바뀌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는 자기의 그런 확신을 사업으로 연계하기로 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와  ‘생극 추모공원’을 건립했다. 
 
담당 공무원 설득이 난관
지금은 크게 성장해 1만 5400평의 너른 대지에 5만 4000기를 안치할 수 있는 대규모의 추모공원이 됐지만 이 사업을 처음 추진할 때는 난관이 많았다.
최우선적인 문제는 변해가는 장례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담당 공무원들을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김 회장은 담당 공무원을 설득하기 위해 음성에서 청주로, 청주에서 서울로 쫓아다니면서 장차 변화될 장례문화에 대해 설득하고 다녔다. 그 결과 마침내 1999년 국내 최초의 사설 추모공원인 ‘생극추모공원’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무극로타리클럽 가입 
사업으로 성공을 거두게 된 김회장은 2005년에 무극로타리클럽에 가입해 봉사활동에 참여한다. 가난한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그는 언제나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봉사단체인 무극로타리클럽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로타리안으로 활동하면서 오랫동안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했던 그는 지난해 회장으로 취임했다. 김 회장은 무극로타리클럽의 전통에 따라 회장 취임식 때 화환 대신 받은 쌀을 저소득층 가정에 전달하는 것을 시작으로 복지사각지대를 발굴해 지원하는 협약 체결, 장애인복지관 후원, 노인복지관 안마의자 기증, 내외국인 120여 명에 의료진료 봉사활동 전개, 노인일자리 지원사업 업무협약, 사랑의 집수리, 보건진료소 격려 위문품 전달 등 다양한 봉사 활동을 했다. 

지역사회로 봉사 영역 확대
로타리안으로 봉사활동에 매진하던 김 회장은 점점 더 지역사회로 봉사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지인들과 함께 ‘음성미래사회발전협의회’를 발기했다.
음성미래사회발전협의회는 음성군의 각계각층 인사가 참여하는 사랑 실천의 장으로 김일중 회장은 2017년 11대 회장을 엮임했다. 이러한 공로로 김 회장은 각계각층으로부터 감사장과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정직한 삶’이 생활신조
김 회장은 자신의 생활신조가 “정직하게 남을 속이지 않고, 거짓 없이, 법 없이도 모두와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어려운 시절 강직한 성격의 남편 곁에서 무던하게 함께 애써준 아내 문희순(53) 씨와의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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