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토크 22번째 손님, 이상정 의원
취중토크 22번째 손님, 이상정 의원
  • 이상훈 대표
  • 승인 2015.05.15 1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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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평가는 군민의 몫, 역할 다하겠다”

음성군공무원이 가장 존경하는 군의원
가족과 함께 전국 누비는 여행 매니아


음성군의회 이상정 의원(53)이 전국공무원노조 충북본부 음성지부에서 선정한 공무원이 가장 존경하는 군의원에 선정됐다.

그는 1989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바로 낙향해 음성군 존폐와 관련된 소이면 갑산리 산업폐기물 반대를 승리로 이끌고 농축산물 가격폭락에 대비한 농축산물가격 안정기금 조례제정 운동으로 전국최초로 주민발의 조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인물이다.

그는 지난해 6월 음성군 농민단체의 요구로 음성군의회에 도전했고 소이지역 후보단일화 여론에서 74.4%의 압도적인 결과로 군의회에 진출, 군민의 대변자가 됐다. '군의원이 되니 양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 가장 불편하다'는 이상정 의원을 본지 스물두번째 취중토크 명사로 초대했다.


Q 술을 많이 안드신다고 하는데 취중토크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량은 어느 정도나 되십니까.

A 소주 3잔이 적당합니다. 하지만 취중토크니 편한 맘으로 좀 마시겠습니다. 그래야 저도 오랫만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지 않겠습니까. 취중토크가 그런 의도 아닌가요(웃음).

Q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소주 세잔 마시고 시작할까요(웃음).
A 예.편한 마음으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시죠.

Q 지난 4월 공무원노조 음성군지부가 실시한 으뜸부서장·의원 설문조사에서 가장 신뢰하는 의원으로 선정됐습니다. 소감을 말해주시죠.
A 예상도 안했고 의회에 입성한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이런 과분한 상을 받으니 기쁘기도 하지만 부담이 큽니다. 기대와 함께 더 잘 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Q 짧은 기간이지만 군의원으로 가장 보람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A 군의원이 되고 농민들에게 '고라니 때문에 농사 못 짓겠다'는 얘기를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보니 지난해 유해동물 피해방지 시설예산 6800만 원 중 3000만 원 밖에 신청이 안됐어요. 음성농민 평균연령이 65세인데 농산물 가격보다 고라니가 문제라니 그걸 해결하면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전 예방책으로 농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유해동물 방지시설을 만들라고 홍보했구요. 그 결과 올해는 2억 원 정도 시설 신청이 들어왔습니다. 군과 의원들을 설득해 이번 추경에서 중복신청자를 제외하고 신규 신청자들에 대해 전액 지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이렇게 농민을 도울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Q 아버님(이달영·83)께서 금왕·원남 우체국장이셨다고 하는데 어릴 적 얘기를 해주시죠.
A 아버님은 집안사정으로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셨습니다. 대학중퇴 후 9급 공무원으로 우정사업본부에 들어가셨고 저희 5남매를 모두 대학에 보내셨어요. 그러다 보니 가정은 늘 어려웠고 5남매중 4째인 저는 초등학교 때 늘 어머니를 따라 밭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누나 형은 모두 타지에서 학교를 다녔고 집에는 저와 동생이 있었는데 동생은 어리니 어머니는 늘 저를 데리고 일터에 가신거죠. 저는 일하기가 너무 싫어 '일이 싫다'는 시를 쓰기도 했는데 선생님께서 잘 썼다고 칭찬해주셨습니다(웃음).

Q 시가 기억나시나요?
A 그럼요. 5학년 때 쓴 시 입니다. '따뜻한 여름 주말 오후 친구와 놀고 있는데 상정아~ 어머님이 부르신다 밭에 가기 싫어 숨었는데 번개같이 달려들어 내 손목을 끌어내는 엄마 그날 나는 노예가 된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일하기 실은 어린이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나요?(웃음) 일하기는 싫고 놀고는 싶고... 어린 마음에 저는 농촌에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넉넉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저를 초등학교 6학년 때 형제가 있는 청주로 보내셨는데 혼자 있을 때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렸지만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야한다는 생각이었고 그것이 효도라고 생각했어요. 청주에서 중학교 1년을 다니고 청주교대를 졸업한 큰 누나가 서울로 발령받자 충남대 재학 중인 형과 누나를 따라 중2때 대전으로 또 전학 했습니다.

Q 사춘기에 전학을 많이 다니셨는데 적응은 어렵지 않았습니까?
A 누나와 형에 의지해 크게 힘들진 않았습니다.

Q 학창 시절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A 중 2때 철이 들면서 독립 운동이 하고 싶었습니다. 특이했죠? 여러 사람을 위해, 사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사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일제시대라면 나는 독립운동을 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었어요.

Q 그때부터 사회, 정치 이런 것에 관심을 가졌나요?
A 아닙니다. 제가 중3때 10.26사태로 박대통령 서거라는 속보를 봤습니다. 저는 대통령이 죽었으니 곧 나라가 망하겠구나 큰일났다고만 생각했어요. 제가 남대전고 1학년 때 학원자율화 관련 시위가 있었고 학생들은 학원 민주화, 교복자율화를 부르짖으며 교모를 태우는데 저는 모자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끌어안고 집으로 갔던 기억이 납니다. 비판적이거나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Q 그럼 대학시절 사회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겁니까.
A 고등학교 때까지는 독립운동처럼 우리사회 어려운 부분을 내가 해야겠다 그것이 환경을 지키는 일, 분단된 우리민족 통일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대(84학번) 입학 당시는 학원자율화로 학교에서 경찰이 모두 물러나고 자유롭게 시국을 논의하던 시기였는데 그때 광주사태 사진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이런 곳에서 살고 있구나 이건 정말 아니다'라는 거죠. 한편으로는 부모님이 고생해서 대학에 들어왔는데 꿈을 갖고 잘돼야 한다는 마음과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얘기해야한다는 생각에 고민이 많던 시절이었습니다.

Q 소위 말하는 운동권 학생이셨나요?
A 그러지는 못 했던 것 같아요. 학내 시위대에 가담하는 것도 큰 결심이 필요했던 학생이었습니다. 어렸을때부터 생각해온 것이 중·고·대학을 거치면서 성장하고 정리돼 '내 개인적인 출세나 기득권에 연연하지 말자 내 삶의 중요한 가치는 어려운 사람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이다 봉사와 희생만이 나의 중요한 가치다 사회적 약자, 민중을 위해 사는 것만이 가치있는 삶이다' 로 정립된 겁니다.

Q 그런 생각이 정리돼 농촌 농민의 대변자의 길을 가게 되신 거군요.
A 계기가 있었습니다.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구로 갑구 투표 도중 부정투표함 밀반출사건이 일어 났습니다. 구로구청 투 개표장에서 백지투표다발이 적발됐고 시민과 학생 수천 명이 구로구청에서 항의농성을 벌였는데 그곳에 저도 있었습니다. 연일 수천 명의 학생·시민이 부정선거규탄대회 등을 열며 밤샘 농성을 하자 정부가 무장경찰을 투입해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하며 진압작전을 개시해 사상최대 1천여 명의 시위대가 연행됐습니다. 저는 폭력, 선거법,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구속됐습니다. 구속 3달 만에 집행유예로 석방됐지만 국민들에게 부정선거를 알리며 농성자들의 최후거점이었던 구로구청 5층 옥상에서 진압직전 태극기를 흔들며 눈물로 애국가를 불렀던 당시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Q 석방되면서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나요? 아버지의 반응은 어떠셨습니까.
A 아니죠. 대학4학년인 1988년에는 전북 고창군 해리면 삼양사농장 토지반환운동에 학생대표로 참여했고 서울 삼양사에서 고창농민 300여명의 한 달 농성을 도왔어요. 우여곡절 끝에 정부고시가로 토지를 반환해 주도록 협상했고 그 과정에서 농민을 위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내 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 89년 졸업과 동시에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부모님은 반대하셨지만 한편으로는 아들이 여러 가지 힘든 일을 당하는 것을 보시고 옆에 두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신거 같아요.

Q 사모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A 농민운동 중 지인의 소개로 만났습니다. 저는 음성농민회 사무국장이었고 아내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서울 전국농민회총연맹에서 실무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촌놈이지만 아내는 신촌에서 초·중·고·대학교를 나온 완전 서울 토박입니다. 아내는 농촌을 전혀 모르면서 농촌에서 농민을 위해 살겠다 는 마음인데 마침 농촌총각인 저를 만난 겁니다. 당시 지금처럼 농촌총각이 큰 문제였는데 저는 아내를 만나 농촌 총각을 면했으니 감사한 일이죠(웃음). 현재 소이지역아동센터 대표로 봉사하고 있는 아내는 제 친구이자 동지입니다. 서로 생각하는 가치가 같고 추구하는 삶도 일치합니다. 제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Q 프로포즈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A 그런 것은 없었어요. 나는 농촌에서 어렵게 살았고 당연했지만 아내는 농촌으로 내려와 어렵게 농촌의 삶을 살면서 그 삶의 가치를 존중하며 살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내가 먼저 결혼얘기를 꺼냈고 결혼에 느긋했던 저는 오히려 고마웠습니다. 서울 중산층인 처갓집은 기독교 집안으로 청빈하고 겸손, 검소한 가정이었는데 저희들의 결혼을 처음엔 많이 반대했습니다만 결국 저희들의 뜻을 인정해 주셔서 지난 1993년 제가 30세, 아내가 26세에 결혼했습니다. 아쉽다면 연애기간이 너무 짧아 여느 연인들처럼 좋은 시간을 많이 갖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종종 아내에게 좀 더 일찍 만나 연애기간을 길게 가졌으면 좋았을걸 하고 말해요. 결혼후 농촌생활을 시작한 아내는 각종 농사일로 많이 힘들어 했거든요. 고추농사, 밭농사 논농사 등등 안 해 본 게 없었죠. 그 후에 양계로 전업했습니다.

Q 슬하에 자녀는 어떻게 두셨습니까.
A 딸, 아들 하나씩 두었는데 아이들은 모두 청주에서 대학,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

Q 다시 태어나도 사모님과 결혼하겠습니까?
A 저는 그러고 싶은데 아내는 다음 생에는 저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웃음).

Q 군의회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언제였습니까.
A 2013년부터 계속 음성군 농민단체 등에서 얘기가 있었습니다만 저는 계속 고사했어요. 그런데 농민회 활동만으로 일하는 것이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선거 6개월전 쯤 결심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정치를 통해 출세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고 농민과 같이 하겠다는 생각 뿐 이었습니다. 주민의 대표인 의원이 주민과 같이 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것이 군의원의 기본 가치니까요.

Q 과거 당적은 어디에 두셨습니까.
A 처음엔 민노당 이었습니다. 당적을 갖고 있었지만 소극적이었죠. 음성군농민회가 객관적이고 냉철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2012년 당시 야권 연대 차원에서 통합진보당 당원이 됐고 총선에서 지지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총선 후 통진당 내분으로 바로 탈당했으니 당적은 3개월 정도 유지한 겁니다. 아시겠지만 지난 지방선거기간 중 그것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Q 현재 무소속이신데 새누리당이나 새정치민주연합에서 러브콜이 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A 지난 선거기간 중 두 정당에서 얘기가 있었지만 저는 지방자치에 정당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일을 하는데 당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기초의회는 정당을 폐지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Q 본인이 생각하는 진보는 어떤 것입니까.
A 요즘 사람들은 진보라면 과격하고 합리적이지 못하고 분열을 떠올립니다. 진보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는 오만, 내가 해야한다는 욕심, 나만 옳다는 배타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누가 진보라고 하면 부담스럽습니다. 진보는 한 발짝씩 앞으로 나가는 것, 다수의 민중을 대변하며 앞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가치있는 일이고 그 일을 하겠다는 것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 제 자신에 대한 믿음도 있습니다. 요즘 대부분 사람들이 살기 힘들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들이 조금씩 좋아져야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는 현실이 많아 안타깝습니다.

Q 아내는 군의원으로 일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고 들었습니다.
A 그 사람은 농촌에서 살면서 농촌의 더 나은 삶을 위해서만 일하라고 합니다. 당신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기회를 주고 깨끗하고 순수하게만 살자고 하는 사람이예요.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혹자는 저에게 더 큰 것을 생각해 보라고도 하지만 저는 전혀 생각이 없습니다. 오직 군민을 위해 충실하게 일하고 성과가 없고 제 역할이 없다면 저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습니다.

Q 의원이 되기 전부터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군수가 목표가 아니냐는 말이 있습니다.
A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의원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아요. 오히려 닭 잘 키우는 것이 이득이 됩니다(웃음). 저는 열심히 하고 성과가 없다면, 그리고 군민이 지지하지 않는다면 닭이나 키우며 살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래뵈도 저희 양계농장이 음성군에서는 가장 큽니다(웃음).

Q 취미는 뭔가요?
A 여행입니다. 역마살이 꼈다고 하죠. 닭을 출하하고 나면 한달 정도 시간이 있는데 그때마다 2~3일씩 가족여행을 즐겼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웬만한 도시는 다 다녔는데 군의원이 되고 나서는 그것을 못하고 있습니다.

Q 늘 즐기던 가족여행도 못가는데 자녀들은 군의원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A 저는 아이들에게 부모와 상관없이 독립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대학 들어가면 알아서 독립하라고 하고 부모를 위해서도 부모에게도 도움 받을 생각 말라고 해요.

Q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A 롤 모델을 정하고 그의 삶을 본받을 수 있지만 존경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내 뜻에 따라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본인의 그간 의정활동 점수는 얼마나 될까요.
A 이제 초년생인데 점수를 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아요. 군의원이 되겠다고 결심했을때 제대로 된 군의원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했어요. 평가는 군민의 몫입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제 이름에 정사 정(政)자를 넣어주시고 행정고시로 공무원이 되라하셨지만 저는 지금 같은 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제가 생각하는 가치(價値)는 절대로 내려놓지 않을 겁니다. 계속 말씀드립니다만,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바로 그만 두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음성군민에게 한마디 하시지요.
A 저는 평소 군의원 뱃지를 달지 않는데 요즘 경로잔치 때문에 뱃지를 달고 있습니다. 어르신들은 저를 모르지만 뱃지를 보면 의원인가보다 하셔요. 뱃지에 부끄럽지 않은 의원이 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간 농민회 활동으로 많은 일을 한 것이 보람이고 큰 기쁨이었습니다. 제 인생 덤으로 의원이 됐는데 농민, 군민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싶습니다. 군민들께서 기대하고 뽑아주셨는데 제가 일을 잘하면 더 많이 지지해 주시겠죠.

진행·글 = 이상훈 대표기자
사진 = 임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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