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큰 교회, 은혜로 충만했던 순간들
작지만 큰 교회, 은혜로 충만했던 순간들
  • 고병택
  • 승인 2014.04.07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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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장로교회 김완식 목사


“대학 시절에 하반신이 마비되는 일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말할 수 없는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서 기도 중에 치료를 받았습니다”

“평생 휠체어를 탈 수 밖에 없었던 내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일어나 걷게 되면서, 제2의 인생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은혜로 충만했던 김완식 목사의 청년시절 신앙체험, 그는 '이사야 41장 10절'을 소개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 놀라지 말라 /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각박한 세태, 그는 귀한 존재로 늘 우리곁에 있었다.

섬김과 봉사…소박했던 삶의 여정
김완식 목사는 충남 연기군 전동 면장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아버님은 면장 재직시 지역 6개 부락 주민들의 어려움을 알고, 그들의 세금을 모두 내 줄 정도로 천성이 착한 분이셨다”며 “자식들에게도 참으로 자상한 분이셨다”고 회상한다.

지금은 폐교가 되어 버린 달성초등학교 교정에 부친의 공적이 담긴 비석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내인 유지숙 음성군노인복지관 관장은 교회에서 만났다. 신학대학교 졸업반인 1978년, 같은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아내를 중매로 만나, 많은 축복속에 가정을 꾸렸다.

미국 미시건 대학교에서 성악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장남은 현재 디트로이트 한인교회 전임 사역자 및 성가대 지휘자로 섬김을 이어가고 있다.

성실한 인품으로 곁을 지키고 있는 차남은 항상 든든한 모습으로 부모의 소중한 삶을 동반하며 매번 행복을 선사하고 있다.

“제2의 인생, 하나님을 위한 삶”
음성장로교회는 1946년 5월 14일 음성 초대 군수였던 장현팔 장로를 포함, 몇 명의 교인들이 관사에서 첫 예배를 드리면서 세워졌다.

오랜 세월 어려웠던 교회는 1980년대 초반 잠시 70여 명의 교인들이 모이게 되지만, 다시 시련을 만나 7명만 남은 조그만 교회가 됐고, 김완식 목사는 이 시절 부임하게 된다.

김 목사는 “7명에서 50명 다시 100명으로 성장하면서 교회가 교회됨을 찾아가며, 비로소 섬김과 봉사를 찾게 됐다”며 “그동안 봉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성도들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기적 같을 뿐”이라며 당시를 술회했다.

교인의 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김 목사는 “한 6000명쯤 된다”고 답했다.

“정말입니까" 되묻자 “복지관에 5400여 명의 회원이 있고 경로대학에 300여 명이 있고 교회에 300명 정도 모이고 있으니 6000명이 맞지 않으냐”며 웃어 보였다. 우문현답이다.

거룩한 예배당에 웬 '성주풀이'
10명도 채 되지 않았던 성도들과 함께 했던 30여년의 세월, 김 목사의 사회봉사활동의 계기는 의외로 소박했다.

김 목사는 80년대 말 구정, 고향에 가지 못한 분들을 위해, 점심에 떡국을 대접하면서 봉사를 배웠다고 했다.

이후, 그는 94년 3월부터 교회 어린이들에게 경로사상을 가르치기 위해, 경로식당을 운영한다. 이에 대해 김 목사는 “경로식당은 성도들의 봉사와 교제 그리고 전도를 목적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관내에 소문이 나면서 97년, 음성군은 약 1500여 명의 실직자를 위한 '실직자 식당'을 제안, 김 목사는 이를 수락한다.

김 목사는 실직자들의 자존심을 고려해, 이름을 '열린 사랑의 무료식당'으로 바꾸고, 교사, 일반 직장인들에게도 식사를 제공, 누가 실직자인지 알 수 없도록 배려했다.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역 특성상, 실직자들의 참여는 줄고, 어르신들의 숫자가 점점 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게 김 목사의 아쉬움이다.

김 목사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경로 대학'과 관련된 일화 한가지.

지난 2001년도 첫 입학생 모집시, 교회에서 진행하는 과정이라 등록하면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우려 때문일까? 좀처럼 등록을 하지 않던 어르신들이 예배당 강당에서 공연된 청주 국악원의 '성주풀이'를 듣고, 마을을 열었다 한다.

김 목사는 당시를 기억하며 “아 차, 큰일 났구나. 거룩한 예배당에서 웬 성주풀이냐 생각한 교인들이 충격을 받고 나가는 줄 알고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며 미소를 보였다.

지난 2003년 1월부터 위탁받은 음성군 노인복지관의 관장직을 맡고 있는 아내에 대해, 그는 “어르신 공경이 몸에 밴듯하다”며 “언제 보아도 그 모습이 마냥 좋고 아름다울 뿐”이라며 애틋한 심경을 피력했다.

그는 “목회자는 지역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봉사와 섬김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마음을 알고 따라와 준 성도들에게 항상 감사함을 잃지 않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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