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완 선 음성군국악협회장
어 완 선 음성군국악협회장
  • 음성자치신문
  • 승인 2018.01.1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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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패러다임을 새롭게 쓰는 ‘의지의 농부’
▲ 어완선 회장이 손수 마련한 국악체험장에서 애지중지 아끼는 북을 만지며 국악사랑을 전했다.
▲ 어완선 회장이 손수 마련한 국악체험장에서 애지중지 아끼는 북을 만지며 국악사랑을 전했다.


음성군 곳곳에서 우리의 소리가 울린다. 사물놀이의 힘찬 울림과 풍물단의 흥겨운 연주가 음성 하늘을 수놓고 있다. 그런가 하면 농산물 생산원천지인 논밭에선 농부의 구슬땀이 강물을 이룬다. 우리의 소리를 이어가며 먹거리를 생산하는 의지의 농부가 있다. 어완선(53) 한국국악협회 음성군지부장(이하 음성군국악협회장)이다. 가난을 딛고 국악인으로, 미래 농업인으로 우뚝 선 '의지의 음성인' 어 회장의 인생여행을 시작한다.

만년 꼴찌 최고 고교 합격 충격
어완선 회장은 대소면 소석리 전형적 농가에서 5남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농가라지만 소작농의 설움이 그러하듯 그의 가족의 삶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초4학년 때부터 품앗이를 다녀야 할 정도니 그 형편이 오죽했을까 싶다. 중3때다. 고교진학은 꿈도 꾸지 못할 처지. 게다가 농삿일에 매달리다보니 학업은커녕 출석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런 그가 엄감생심. 기계공고 진학이라니...(당시 기계공고는 최상위권 학생만 진학가능) 가족의 만류는 당연지사. 입학원서 써봤자 학교 망신이라는 핀잔까지 들었다. 하지만 학업에 대한 열망은 가난이라 할지라도 막을 수 없었다. 담뱃잎생산창고에서 추위를 이겨가며 주경야독한 결과, 누구도 믿기 어려운 합격을 이뤄냈다. 976명 모집에 111번째로 당당히 그의 이름을 올렸다. 그는 부윤초와 대소중을 거쳐 평택기계공고에 진학했다.

전국 최연소단체장 당선
고1때다. 먹고 살기조차 힘든 시절에 음악이 왠 말인가? 선배의 권유로 자의반 타의반 관악부에 들어갔다. 처음 접하는 신기한 악기들이다. 섹소폰, 클라리넷 트럼펫... 드럼이라는 것을 처음 배웠다. 고3 때는 일찌감치 취업했다. 졸업하기도 전에 사회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인천 17사단에서 군 복무한 그는 전역 후에도 인천에서 거주하며 벽돌생산공장과 건축, 가방생산공장 등 안 해본 것 없이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그러던 27세 때. 빌라를 신축하고 분양하던 중 한 입주민의 여조카를 소개받는다. 바로 그의 아내 장현상(50)씨다. 그는 장 여사 사이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그는 비디오 촬영가이기도 하다. 프로덕션을 운영하며 여러 예식장과 유치원 등에서 촬영작업을 했다. (사)한국영상음반판매대여업협회장에 당선됐다. 그의 나이 28세 때 일이다. 전국 최연소 단체장이 됐다. 이 기록은 지금도 여전하다.

귀향...농부의 길

결혼 4년째 되던 해인 2009년 6월 25일. 야외촬영장을 운영할 계획으로 귀향을 선택했다. 하지만 계획은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고향 시골은 농삿일 외엔 허락하지 않았다. 농부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경운기와 건조기를 구입하고 트랙터를 구입해 동네 일까지 도맡아 했다. 이후 농촌진흥청으로부터 농촌체험농장 인증을 받았다. 6차산업 인증을 받은 것이다. 농어촌식생활개선 인증도 받았다. 그가 일구는 논만해도 8만평에 이른다. 많은 체험학습장이 과일따먹기식 단순 체험에 그치지만, 그의 농장은 6차산업 농업을 넘어 드론과 3D프린트 등 4차산업과 연계한 미래 농업을 꿈꾸고 있다. 그가 직접 생산한 유황액비는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도 벌레피해를 손쉽게 막을 수 있어 친환경농사가 가능하다.

국악...제2의 인생
그러던 어느 날, 시골 고향에서는 행사 때마다 풍물단 공연이 있었다. 이를 지켜본 어 회장은 가족 사물놀이팀을 만들고 싶었다. 이를 계기로 국악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의 연주실력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강의섭외가 들어왔다. '큰울림풍물단'이 조직되기도 했다. 국악과 함께 제2의 인생이 펼쳐진 것이다. 한국국악협회 음성군지부가 조직됐다. 이때부터 줄곧 회장직을 맡고 있다. 국악인으로서 활동범위가 넓어지면서 풍운아 국악인이 아닌 전문적 지식이 필요했다. 백석예술대학교 국악과에 진학했다. 늦깍이 국악생도가 된 셈이다. 대규모 농삿일과 대학생활의 병행은 고난 그 자체였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출석하기 위해서는 새벽까지 농삿일을 끝마쳐야 했다. 여간 의지가 없으며 이룰 수 없는 일이였다. '의지의 음성인, 어완선'. 바로 그이다.

국악인으로 활발한 활동
그의 국악 전수활동은 유치원과 초중학교, 주민자치센터 등 14곳에서 이뤄졌다. 지금은 농삿일로 4곳으로 대폭 줄였다. 특히 생극주민자치센터 드림아리난타팀은 음성군에서 1등, 충북에서 3등을 했다. 대소중학교 사물놀이팀은 충북교육청이 주최한 세계학술대회에 초청공연을 펼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부윤초 대취타와 설장구는 지도 3년만에 설성문화제와 품바축제 등에서 공연을 펼쳤다. 그는 충북국악협회 이사, 한국국악교육원 충북지도사시험 심사위원, 풍물명인 인증, 인간문화재 1호 전수자이기도 하다.

그의 끊임없는 도전과 꺾이지 않는 의지가 음성군 국악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임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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