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토크 24번째 손님, 이언구 충북도의회 의장
취중토크 24번째 손님, 이언구 충북도의회 의장
  • 이상훈
  • 승인 2015.11.13 13: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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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분위기·솔직 고백·명사에게 듣는 취중진담

명사들이 술의 힘을 빌어 가슴에 담아있는 얘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독자들에게 감동으로 다가가는 화제의 취중토크!
음성자치신문 스물네 번째 취중진담 명사로 이언구 충북도의회 의장을 초대했다.
그는 중부매일신문 제2사회부 차장, 국회의원 정책보좌관을 거쳐 제8대 충북도의회 의원으로 한나라당 충북도의회의원 원내 대표,
그리고 제10대 충북도의회 전반기 의장과
전국 시`도의장협의회 부회장으로 종횡무진 활동 중이다.
살아있는 눈매, 넘치는 카리스마, 절제있는 언변의 이 의장은 편안한 웃음과 함께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가감없이 전달했다.

“중부권 거점도시 음성군 발전을 돕겠습니다”




Q 평소 주량은 얼마나 되십니까.
A 술도 좋아하고 술 좀 마신다는 얘기를 듣습니다만, 오늘은 인터뷰 이후에 또 다른 일정이 있어 간단하게 한 잔만 마시겠습니다.

Q 최근에 '속 시원하게 살자'라는 책을 내셨죠? 어떤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A 힘들었던 어린 시절부터 충북도의회 의장이 되기까지 그간의 얘기를 담담하게 썼습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의 인연,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만남 등 정계 인사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통 큰 충주를 만들어보겠다는 저의 의지도 담았죠. 책을 집필하면서 처절하게 자신에 대해 뒤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속 시원하게 사는 방법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마음이 풍요로웠던
행복한 어린 시절

Q 도의장님의 어린 시절은 어땠습니까?
A 가난했죠. 시골은 거의 다 그랬어요. 비단 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아버님 고향이 강원도 홍천인데 6.25 때 피난 내려와 정착한 곳이 충주였어요. 할아버지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아버님은 가장이나 마찬가지셨습니다. 아버님과 작은 아버님 두 분이 부지런히 열심히 사셔서 방앗간 두 개를 마련하셨답니다. 그러던 차에 전쟁으로 두 분 다 징집돼 집에 남자가 없는 와중에 방앗간이 차례로 불이 났으니 제대 후 집에 돌아와 얼마나 막막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버님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저희 5남매를 키우셨고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하는 상황이었지만 마음만은 늘 풍요롭게 지켜주셔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Q 어린 시절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요?
A 예전에 배터리로 물고기를 잡는 낚시기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사랑방에 그 낚시기구를 두 개씩 만들어 놓고 동네사람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했구요. 물고기를 잡아오면 어머니는 큰 솥에 그 물고기를 푹 끓여 뼈는 걸러내고 진한 육수를 만드셨어요. 홍두깨를 쓱쓱 밀어 굵은 면발을 육수에 넣고 고추장을 풀어서 칼국수를 만드셨습니다. 요즘 생각하니 그것이 장칼국수인데 지나가던 사람도 함께 먹었던 기억이 있어요.
또 동네에서 유일하게 우리집에만 전화기가 있었는데 모든 안부 전화가 저희 집으로 오면 제가 뛰어가서 '전화 받으시라'고 전달했습니다. 그 덕에 저희 집은 늘 북적 북적했구요.

Q 학창시절엔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A 초등학교 때부터 웅변을 시작했고 재능이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상도 많이 탔고 중학교땐 전국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탓에 학교생활은 조금 소홀했던 것 같아요.
웅변을 하다 보니 그 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던 합동연설회에도 관심을 갖게 됐는데 자연스레 어른들과 어울리곤 했어요. 중학교 때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밤새 따라다니다 부모님께 혼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을 자주 접하다 보니 사회에 적응이 빨랐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어른들의 세계를 미리 알았다고나 할까요. 학교 친구들도 저를 어른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돈의 중요성을 알고 돈을 벌기위해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사업을 시작했어요.

Q 여러 가지 사업을 하셨는데 주로 어떤 사업을 하셨나요?
A 군대 가기 전 단무지 사업을 했습니다. 당장 돈이 없어 군청에서 융자를 받아서 단무지 탱크를 짓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제법 장사가 잘됐어요.
군 제대 후에는 선·후배와 군대 제대 전 계획했던 '웅우 농산'을 설립하고 농산물 직거래 유통 사업을 했습니다. 서울 반포 1·2단지 아파트, 방배동 주공 아파트 단지 등의 부녀회와 계약을 맺어 충주에서 농산물을 직접 트럭에 싣고 가서 팔았는데 그 때 정말 신나게 일했어요. 즐거웠던 시절이었죠.
또 고춧가루, 김치 회사도 했었고 청계천에서 볼트너트 사업도 했었습니다. 예식장을 해보려고 다 계획해 놓았는데 병이 들어서 포기한 적도 있고 사업이 망해 건축 노동자 생활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니 정말 여러 가지 사업을 많이 했네요.(웃음)

강한 추진력으로


새로움 추구
Q 정치에는 어떻게 입문하셨습니까?

A 선배 권유로 중부매일 공채1기로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즐겁게 일하다보니 어느새 14~5년이 흘렀구요.
그러던 중 이원성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맡게 됐는데 당선 6개월 만에 쓰러지신 겁니다. 그때부터 임기 때까지 사무국장 겸 정책보좌관 생활을 했고 그 후에는 주유소를 잠시 운영했습니다. 어느날 주유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지인이 와서 도의원을 얘기하는 겁니다. 한번 해보라구요. 그 이야기를 듣는데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제가 원래 새로운 것을 끝없이 찾는 스타일이라 한번 해보자 결정을 한 후에는 망설임 없이 2006년도 지방선거에 출마했고 당선이 됐습니다. 건설문화위원장을 맡아서 나름 열심히 했는데 2010년 선거에서는 고배를 마셨죠.

Q 낙선 후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어떠셨어요?
A 2~3일 동안은 그야말로 허망하더라구요. 그런데 마음을 다잡게 된 계기는 뜻밖에도 아들 덕분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들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선거결과가 나온 날 전화가 온 겁니다. '내일 뭐하실 거냐'고 묻길래 그냥 '선거 뒷마무리 한다' 했어요. 그런데 아무 말 없이 '알았다'고 전화를 끊는 겁니다.
다음 날 선거사무실을 정리하면서 텅 빈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는데 누가 뒤에 와서 끌어안는 거예요. 놀라서 뒤돌아보니 미국에 있는 줄 알았던 아들인 겁니다. '가족이 최고죠?'라는데 그 이상의 위로가 없었습니다. '내가 이 아이만도 못하구나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그 길로 아들과 함께 월악산에 갔고 아들이 '아버지, 여기서 소리 한번 지르시고 다 잊어버려요'라고 말하는데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다시 마음을 잡고 4년 동안 알뜰히 준비했고 지난 2014년 6.4지방 선거에서 당선되고 도 의장 까지 맡게 됐습니다. 신념을 가지고 열심히 나아가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A 군인인 6촌 형이 서울 장위동에 상가가 딸린 큰 집을 갖고 있었는데 아내와 처형이 그 집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처형은 당시 대사관 텔렉스 실장이었고 아내는 서울시경실 비서였어요. 6촌 형이 아내를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형이 제 인생의 은인이죠.(웃음)
6년 정도 연애를 했는데, 하루는 이천에 계신 할머니께서 한 번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는데 그 때 왜 그랬는지 시간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결혼식 전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는 이미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더라고요. 제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고 미안한 일 중 하나입니다. 막내딸이라 할머니 귀여움도 독차지 했을 텐데 그 때 가서 인사도 드리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요.

Q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자녀는요?
A 아내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납니다. 한 여자가 결혼할 때는 그 남자 하나만 보고 모든 인생을 거는 거 아니겠어요. 1983년 12월 13일 결혼했는데 그 날은 눈이 하얗게 내렸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마친 아내가 처가 식구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데 눈물을 주루룩 흘리더라구요. 아내는 막내딸입니다. 황새가 수놓아져 있는 한복을 입고 눈물짓던 그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 여자한테 정말 잘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굴곡진 인생을 살다보니 고생을 많이 시켜 늘 미안하고 감사하죠.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딸은 보스턴에서 치과의사를 하고 있고 아들은 MBN 기자입니다.


합리적인 최병윤 도의원
대범한 이광진 도의원

Q 우리 지역 의원인 최병윤 의원과 이광진 의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최병윤 의원은 저와 충주에서 30년 이상 선후배 사이로 가깝게 지내왔습니다. 최 의원은 상당히 합리적인 친구죠. 현재 저와는 소속 정당이 다릅니다.
이광진 의원은 친하게 지낼 기회는 없었는데 지켜보면 대범한 기질이 많이 있습니다.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나름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것 같더라구요. 사귀어보고 싶은 친구입니다.

Q 이시종 도지사와는 고향이 같으시죠. 도지사님과는 어떠십니까?
A 고향은 같은데 저는 충주고 출신이고 지사님은 청주고 출신입니다. 출마할 때마다 본의 아니게 반대편에 서게 되었죠. 지사님은 정말 열심히 일하시는 분입니다. 저는 도의회 의장으로서 사안에 따라서는 도와드리기도 하고 문제가 되는 부분은 철저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사님께서도 의원들을 배려하고 많이 애쓰고 계셔서 원만하게 의회가 운영 되고 있습니다.
Q 국회의원 출마설도 있습니다. 맞습니까?
A 아닙니다. 제 스스로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충주가 최근 이런저런 일로 선거 공화국처럼 돼버렸어요. 그러다 보니 시민들은 상처받고 공무원들도 어수선합니다.
저는 늘 이러면 안 된다고 주장을 해왔던 사람인데 그런 저의 행보들을 깰 명분이 없죠. 저라도 충주를 지켜야 합니다. 또한 나이가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지역을 위해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고 목소리를 낼 의무가 있지 않은가 늘 생각합니다.
저만의 입신양명을 위해 출마할 생각은 없습니다.

영향력 있는


명강사가 될 터

Q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A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배움은 짧았지만 어머니를 가장 존경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살아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늘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항상 말씀하셨어요. 남한테 베풀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베풀고 베푼 것 만큼 돌려 받을 생각은 말라고요. 그러면 그것은 반드시 후회로 돌아온다는 확실한 철학이 있으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요즘 책을 읽다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온다는 거에요.
또 반기문 사무총장을 존경합니다. 그 분과 대화하면 마음으로부터 존경이 우러납니다. 저런 분의 천분의 일이라도 따라갈 수 있는 인생을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대화건설(주) 안용석 회장 역시 존경하는 분 중에 하나입니다. 올해 87세이신 안 회장님은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분이에요. 저는 그런 분들과 대화하고 배우고 하는 지금이 아주 행복합니다.

Q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A 앞으로 명강사가 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저는 남을 설득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고 강연 할 때 흡입력 있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강사가 되고 싶어요.
그런 역할이 정치를 통해서 하려고 하면 부작용이 생기기도 합니다. 저의 강연을 듣고 누군가가 자기 인생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렇게 10년 멋진 강의로 사람들 마음에 행복을 심어주다가 더 나이가 들면 사랑하는 아내와 오래오래 행복한 노후를 즐기고 싶습니다.

Q 음성 군민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A 음성군은 중부권의 거점도시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미 서울의 위성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죠. 앞으로도 그런 발전이 가속화 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특히 음성군은 복 받은 희망의 땅입니다.
도 의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으면 여러 의원들이 힘을 합해 음성군의 발전을 위해 힘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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